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설 (문단 편집) == 기타 == * >'''실패가 내 운명일 수는 있어도, 내 조국의 실패는 될 수 없으리라.''' 일평생을 실패만 반복하고 산 사람인데 젊어서는 공직에 출사했으나 곧 나라가 망했고 [[헤이그 특사]] 사건은 회의 참석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으며 동료 [[이준(열사)|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하기까지 했다.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열었지만 다음 해 일제가 간판을 떼버렸고 성명회와 권업회는 동맹국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제정 러시아]] 당국이 뭉개버렸다. 신한혁명당은 [[고종(대한제국)|고종]] 망명 성공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조직이 와해됐고 결국 48세에 만리 타국 추운 땅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야말로 한창 일할 장년의 나이에 분사(憤死)한 것. 그의 일생을 생각하면 이상설의 유언은 서리서리 맺힌 한과 비애가 느껴진다.[* 다만 이상설에게 1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를 "가장 존숭(尊崇, 존경하고 숭모하다)하는 인물"이라고 밝혔던 [[안중근|한 남자]]가 [[하얼빈]]에서 그가 평생을 두고 증오했을 [[이토 히로부미|원흉]]을 직접 제거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http://news.donga.com/3/all/20180420/89699989/1#csidx5c03aea4cb057c7b8e1489546e7f298|#]]] * 구한말부터 1910년대 만주와 연해주 [[독립운동]]에 발을 안 뻗은데가 없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한국사]] 근현대사 파트의 독립운동에 그의 이름이 빠질 수가 없으니 관련 [[시험]]을 준비한다면 이상설이 활동한 내역을 알고 있는게 좋다. * 엄청난 [[독서]]량으로도 유명했는데 당시에 이미 집에 수천 권을 가진 장서가였고 [[이회영]] 등과 함께 집에서 스터디 모임을 결성해 국제법, 국제정치 등을 공부했다. 이 책들은 나중에 초대 부통령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이 수습해 [[국회]] 도서관에 넘긴다. *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이상설 선생 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에서 1971년 숭모비, 1975년 숭렬사를 건립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459745&logNo=221573124634|충북 진천에 위치한 그의 생가에 세워졌다.]] * 2001년 10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우수리스크]]에 유허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유허비가 매년 [[여름]]에 수몰되는 일이 발생하자 러시아 교민과 [[고려인]]들이 관리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1&aid=0011744117|#]] * 2005년 12월 [[국가보훈처]]에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1층의 역대 성균관장 목록에 적혀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