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작가) (문단 편집) == 평가 == >林檎一個ガ墜チタ。地球ハ壞レル程迄痛ンダ。最後 >最早如何ナル精神モ發芽シナイ >[[만유인력의 법칙|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 >- 이상, <최후> 이상은 전문용어와 외국어, 그리고 숫자[* 참고로 이상의 작품에서 숫자는 후술할 섹드립에 있어서 중요한(?) 노릇을 하는데, 33과 23은 각각 [[성교]](三十三-다리 세 개에 다리 세 개, 二十三-다리 두 개에 다리 세 개), 18은 욕, [[69]]는 그 69 맞다.] 및 기호의 남발, 문법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문장, 기존의 언어체계를 무시하는 기법 등 모더니즘에 입각한 [[아방가르드]] 문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가 쓴 시는 그가 사망한 지 90여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혁신적' 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기 위해 시에서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는 ‘[[다다이즘|다다]]’ 기법을 사용했으나,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와 달리 음절 단위의 문장으로 구성된 [[한국어]]와 애초부터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는 다다이즘 기법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실험 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 참고로 이는 이상의 후기 시에 대한 설명으로 이상의 시작 초기에 쓴 일본어 시들에서 이상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쓴 방법은 시에 수학기호나 외국어 등을 사용[* 이 때문에 국문학자뿐만이 아니라 이공계 학문을 전공한 사람들이 이상 시 문학 연구에 흥미를 갖고 동참한 사례가 많다.]한 것이었다. 또한 성적인 표현을 난해하다 할 뿐이지 표현하고자 할 때는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 때문에 하술하듯 [[고은(시인)|고은]]의 이상 평전에서 그의 문학에 거의 섹드립밖에 없다는 왜곡된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상은 전위적인 형태의 시로 가장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오감도]]'가 처음 신문에 게재되었을 때, 독자들의 반발은 매우 거센 반면에,[* 심지어는 작가를 "때려죽이겠다"는 투고까지 있었다고 한다.] 문학계에서는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 듯하다. 심지어 이상의 문체를 따라하는 학파까지 생겼는데, 이를 삼사문학파[* 1934년 9월 1일 창간된 순문예 동인지. 회원 중에 [[황순원]]도 있었다.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던 동인. 창간멤버(신백수·이시우·정현웅·조풍연) 중 조풍연, 정현웅을 제외하면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다고 한다. 참고로 시인들의 동인지였기 때문에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던 황순원도 여기에서는 시를 썼다. 즉,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시인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긴 황순원이 본격적으로 소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37년 이후부터였으니...]라 하였다. 하지만 이상은 백부로부터 유학과 한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이과를 전공했으면서도 고대 물리학 등 계산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서양의 가치관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그의 수필에서 잘 드러난다. 반대로 삼사문학파 동인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신식 문물을 접하며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 이외에는 서로 기본적인 사고의 방식부터 맞지 않아 삼사문학파는 이상의 신드롬을 이어가지 못하고 이상의 부록 현상으로 끝나버렸다. 이에 대해 답답해하던 이상은 서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 도쿄행을 하게 된다. 이상의 시에 나타나는 분열적인 분위기가 서구화, 현대화된 사상과 생활을 염원하였으나 이를 100%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유교적, 전통적인 가치관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이상이 일본어를 모국어에 가깝게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국어 작품에도 일본어투가 많이 섞여 들어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대표 시들이 너무 해괴한지라 "그냥 이거 아무 의미 없이 휘갈겨 쓰고 사람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아니냐?"라는 소리도 있으나, 학계의 전반적인 반응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이다.[* 위와 같은 주장이 맞다고 해도 이상은 [[김춘수]]보다 30년 먼저 무의미시를 쓴 셈이다. 어느 쪽이든 연구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상은 문학 잡지의 편집자로 일하기도 하였고([[구인회]]의 회지를 그가 편집했다.) 문학가로서의 데뷔작인 [[12월 12일]], 휴업과 사정 등은 평범한 단편 소설이다. 또한 이상이 시를 아무 계산 없이 썼다고 하기에는, 그의 글들이 서로 맞닿아 상통하는 부분이 너무 자명하다. 비록 평소 행동은 좀 괴짜스러웠을지라도, 문학가로서의 이상은 언제나 차분하고 진지했던 것이다. 흔히 이상이 20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펴져있는데, 이 2000편 운운하는 표현은 이상 본인이 오감도 연재가 중단된 후 남긴 작가의 글에서 "이천점에서 삼십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는 대목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는 사후 발견된 글들을 모두 합해도 그 숫자에는 크게 못 미친다. 발굴되지 않은 습작들을 더해서 2000편이 된다고 치면, 작가로서 활동한 기간을 고려할 때 [[자동기술법]]을 사용하기에는 작업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는 주장도 있다. 밝혀지지 않은 모종의 제작 '[[공식]]'이 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그의 글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계속 시도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항을 겪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이상의 비상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증거. 이상이 쓴 시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거세지만 그가 쓴 수필을 보면 이상이 가진 글에 대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촌여정>과 <권태>라는 작품에는 현대화되고 서구화된 일상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 전의 전통적인 자국의 모습을 간직한 시골에서의 일상에 적응을 못하고 권태에 빠진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하였고, 간결한 문체를 바탕으로 수능에 출제된 <조춘점묘>는 쉴 틈 없이 꽉 막힌 답답한 현대인의 일상을 콘크리트로 사방이 둘러싸여 어디로 가든 같은 모습을 한 빌딩에 비유하면서 그 빌딩의 소유자는 보험회사라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점을 들어 개인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였다.[* 일제 치하의 지식인이 가지는 고뇌를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상의 수필들은 작가에 대하여 모른 채 단순히 글 자체로만 감상하면 마치 산업화가 한참 진행되었던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작가가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글의 지은이가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자 깜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국문학 전공자들이 더 그렇다고 한다. 이상 본인은 자신이 다방면에서 [[천재]]라고 생각했고, 그가 남긴 난해한 글들과 자전적인 소설을 읽어보면 자신이 "천재"라는 데에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진 일종의 [[자칭 천재]]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상은 주요 공부 분야였던 건축과 문학만이 아니라 그림과 외국어[* 이상은 프랑스어로 쓴 시들도 남겼다. 이상은 조선어나 일본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읽고 쓸 줄 알았고, 그가 운영하던 다방에서도 프랑스 신문이나 잡지를 읽곤 하였다.] 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다. 그가 다닌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경쟁률이 매우 치열했으며, 현재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엘리트 학교였다. 또한 그 학교 내에서 이상은 입학 이후 졸업 때까지 수석으로 학업이 탁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등교육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익힌 공부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경제적, 가정적으로도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을 앓는 치명적인 고통을 겪었다.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는 자조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 유래된다. 이상이 디자인한 작품은 건축잡지인 조선과 건축 1929년판 표지, 소설 날개의 표지 등이 있으며 조선과 건축 1929년 판 표지의 경우 공모전에서 1위로 입상된 것으로 잡지에서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 사용되었다. 그의 생애를 다룬 평전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고은(시인)|고은]]이 쓴 "이상 평전"이 있는데, 이 평전은 이상에 대한 [[비하]]적이고 [[악의]]적인 시각을 난해한 문장으로 숨겨놓았다. 국문학과 전공자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열등감과 허영심을 충족시키려고 이상을 걸고 넘어지는 저급한 물건으로 보고 있으며, 읽는 시간도 아깝다는 평. 위의 평전에 반발해선지 [[김연수(작가)|김연수]]는 그의 소설 '꾿빠이, 이상'에서 죽을 때까지 이상의 시를 연구하며 그의 삶을 쫓아가는[* 작품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애마저 이상을 따라한다. 결국 이상이 죽은 병원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사망]].] 일흔 살 아마추어 이상연구가를 등장시킨다. 명백한 디스. 한편 [[http://news.donga.com/3/all/20140219/60995186/1|이 기사]]에서 내일 모레면 칠순이 되는 경제학자 김학은 교수가 수학 이론을 가지고 이상의 시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김연수와 김학은 교수는 이상과 마찬가지로 문과 학문과 이과 학문을 섭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과 동질감을 느끼는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