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작가) (문단 편집) === 유년 시절 === [[1910년]]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종로구)|사직동]])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김연창(金演昌)[* 호적명 김영창(金永昌).[[http://blog.daum.net/gijuzzang/8515155|#]]]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곧바로 몰락한 양반인 [[백부]]의 집으로 입양, 유교적인 가풍 아래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양어머니(백모)는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구박받던 스트레스를 이상에게 풀었으며, 이상을 입양한 지 얼마 안 되어 친아들이 태어나자 이상을 대놓고 홀대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상은 여성을 혐오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그가 기누코, 금홍, 변동림과 권순옥 등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을 뿐 아니라, '꾀꼬리 동산'이라는 유사 [[스와핑]]을 했던 것도 이때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백부 또한 어린 조카 김해경을 입양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닌 영특한 머리로 가문을 일으킬 인재로만 생각하여 항상 엄격한 모습으로만 대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목단 열 끗을 똑같이 그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도 하고, 자 없이도 직선을 긋는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상은 화가를 지망했지만 백부가 "세태가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를 곯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환쟁이는 안 된다"고 반대해서 결국 백부의 바람대로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경성고등공업학교를 현재의 실업계 고등학교 정도로 인식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당시 ‘고공(高工)’이라고 줄여 부르던 [[고등공업학교]]는 오늘날 중고등학교를 합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이었으며, 영어로는 "Keijo College of Engineering"으로 번역된 공과대학에 해당한다. 이상이 나온 경성고등공업학교는 5개 학과에 모집인원 총 60명, 입시경쟁률은 13:1에서 27:1까지, 더군다나 한국인의 입학은 매우 어려웠던 (1926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최고 수준의 엘리트 학교였다. 순수학문의 대학과 실용적 학문의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을 분리하여 테크노크라트 엘리트를 양성했던 프랑스식 교육제도를 모방한 제도였다. 동숭동 현재의 한국방송통신대학 자리에 있었다. 광복 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합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되었다.]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 해 건축과 졸업생 12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https://hankookilbo.com/News/Read/201003250574661465|관련 기사]].] [[조선총독부]] 건축 기사가 되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 탓에 이상은 현대화된 도시인의 삶을 살았지만, 보수적인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어 당시 신세대들이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이 탐탁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로서 본인도 이러한 성향을 많이 고민했는지, 말년에 이상이 도쿄에서 [[김기림]]에게 쓴 편지에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바구니에 끼여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요.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는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라고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후에 한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영원한 모던보이의 상징이 된다는 것을 보면 신기한 사실. '이상' 이라는 필명은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하던 당시 한 인부가 김해경을 '긴상(김씨)'라고 불러야 할 것을 김 씨와 이 씨를 헷갈려 실수로 '이상'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보]] 시절부터 절친했던 친구 [[구본웅]][* [[발레리나]] [[강수진(발레리나)|강수진]]의 외할아버지.]이 선물로 준 오얏[* 자두의 옛말.]나무(李 : 오얏나무 리)로 만들어진 화구상자(箱 : 상자 상)를 받고 친구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정하게 되었다는 설도 나와 있다. 전자는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와 아내 변동림의 증언이지만, 후자는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보]] 시절 직접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고 서명한 것이 발견되어 보다 설득력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