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부 (문단 편집) === 말년 === 대가야 정벌 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죽고 어디에 묻혔는지 흔적 또한 없다. 이를 가지고 일각에서는 진흥왕 왕권 강화 과정에서 말년 실각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위 내용과 같이 적어도 3대 왕을 섬기면서 평생에 걸쳐 업적이 상당히 많은데도 [[김유신]] 등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도 기록이 너무 부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사례가 이례적인 경우일 뿐 신라 전기 인물 가운데 임금과 직계 왕족이 아닌 인물의 생몰에 대해 소상히 기록된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사부의 만년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김유신의 경우 업적상 이사부와 비견될 만한 명장이지만 그에 앞서 신라 중대 무열왕계 왕들의 외척이 되는 김해 김씨 집안의 웃어른이었던데다, 이후 김유신의 후손들이 [[김장청|잠시 역적으로 몰려 가문이 몰락했다가]] 9년만에 재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후손들은 가야계 김씨의 전성기였던 김유신에 대한 자세한 행적을 기록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김유신행록]]이고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관련 기록 분량이 많은 것도 김유신행록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즉 김유신 기록이 많은 것은 많이 기록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기록 및 후대의 대우에 있어서 이사부와 김유신에 대해 같은 기준과 관점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이사부 관련 기록이 줄어드는 시점부터 슬슬 [[금관국]] 왕족 계통 [[김무력]], [[김서현(신라)|김서현]] 등의 활동이 대폭 잦아지기도 하는데,[* 그리고 금관가야뿐 아니라, [[단양 적성비]]나 [[창녕 척경비]] 내용을 참고하면 [[대가야]] 계통 인물인 [[도설지왕|도설지]]도 진흥왕이 측근으로 가까이 했던 정황도 나타난다.] 진흥왕이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신흥세력인 가야계를 등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젊은 진흥왕이 자신의 수족으로 젊은 세력을 키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사부 역시 진흥왕대의 최대 군사적 사건 중 하나인 대가야 토벌에 기용되었다는 점에서 진흥왕은 만년의 이사부 역시 노장으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세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사부의 나이는 70대로 추정되며 이미 진작에 은퇴하거나 2선으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나이였다. 따라서 말년에 원로 대신으로서 평안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