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이봉창 (문단 편집) == 생애 == [[서울특별시|서울]] [[용산구|용산]]의 문창소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을 거쳐 [[용산역]]에서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당시 조선인의 내지 전적이 금지된 상황에서 조선인이 일본의 호적을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다른 방법은 [[배우자 비자|결혼]]이나 [[서양자]] 입적 등)] 젊은 시절의 이봉창은 일본을 정말 좋아했으며 조선인[* 사실 국적의 특성상 이봉창도 광의의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출신지의 특성상 한국계 일본인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오히려 [[한국계 일본인]]처럼 살고 싶어했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 될 거라고 믿어 [[일본어]] 공부도 매우 열심히 하여 현지인 수준으로 유창하게 하고[* 조선인이 아닌 통상의 일본인인 척 연기하고 살 때에도 그를 만난 일본인들은 이봉창이 조선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구별도 못했다고 한다. 일본어 발음과 어휘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일본식 이름도 얻어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용산역에서 근무하던 당시 [[3.1 운동]]이 일어났지만 당시 이봉창은 거기에 큰 관심이 없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조선인]]이었고 식민지 사회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4년 동안 [[용산역]]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진 속도와 봉급 차이 등 조선인 차별 대우에 박탈감을 느껴 [[조선총독부 철도국|철도국]]을 사직하였다. 특히 여기에는 [[쇼와 덴노]] 즉위식 당시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것이 큰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쇼와의 즉위식은 1928년 [[11월 10일]]이었고 이봉창 의사는 [[11월 7일]]~[[11월 15일]]까지 구금되었다. [[http://media.daum.net/culture/book/view.html?cateid=1022&newsid=20081020114606189&p=yonhap|#]] [[http://cafe.daum.net/tumenlover/5GYo/271|#]] 그야말로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고종(대한제국)|이태왕(李太王) 전하(殿下)]]의 옥안(玉顔)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국치|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안(聖顔)을 뵌 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봉창은 순수하게 천황의 얼굴이 보고 싶어 즉위식에 참석하려 했건만 일본 경찰이 한글 편지를 발견하면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어 훈방되었으나 조선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이봉창의 전향 과정은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례로 쓰인다. 만약 일본이 선전했던 대로 식민지인에 차별이 없이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전향 전의 이봉창 같은 "훌륭한 근대화 사례"는 권장되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런 이봉창마저도 의심하고 잡아 가두었기 때문.] >"[[교토]] 유치장 구경이나 오려고 돈 써서 여기 온 게 아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자격으로 천황(天皇) 폐하(陛下)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31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게 되고 [[상하이]]에 있는 거류민단 사무실에 도착하여 임정과 접촉했다.[* 다만, 접촉 사유가 골 때리는데, 세간의 인식처럼 독립운동 의사가 있던 게 아니라 당시 불황 중 일자리를 찾던 중 조선인 친구에게서 당시 떠돌던 임정에서 상하이의 영국계 회사에 취직을 알선해준다는 뜬소문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일본인 같은 제스처, 능숙한 일본어[* 임정과 처음 접촉할 때도 한국어를 안 쓰고 일본어를 썼다.], 임정의 멸칭이었던 '[[가정부#s-3]](假政府)'[* 사실 일본어로 '임시정부'를 뜻하는 일반명사이지만 당시 임정을 보는 일제의 시선이 좋았을 리가 없으므로 멸칭으로도 자주 쓰였다.]라는 표현을 씀에 거리낌이 없어 임정 인사들의 의심을 받았다. 누구나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유일하게 [[김구]]가 믿어줘 이봉창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나 김구는 본명이 아닌 가명(백정선)을 알려줬다. 이봉창은 쇼와 덴노 암살 기도로 일제에 체포된 후의 심문에서도 폭탄 제공자에 대해 가명(백정선)을 댔었다.] 이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동녕]]과 [[조소앙]]에게 질책을 듣기도 했다. 이때 워낙 일본인 같아서 임정의 직원들에게서 '[[왜놈|왜]]영감'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 별명을 증명하듯 일본인 사회나 마찬가지인 상하이 훙커우 지역에 거주한 지 1년도 안 되어 일본인 지인을 많이 두었다. 심지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까지 지인으로 두었고 일본 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드나들었을 정도였다.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갈 때 [[부두]]까지 나와서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나온 일본 경찰까지 있었다. 임정 직원들과 함께 [[여관]]에서 한 술자리에서 자신을 밀정이라고 의심을 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는 요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직접 사와 대접까지 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 이봉창 의사는 > "[[쇼와 덴노|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하고(何故, 무슨 까닭)로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라고 묻자 임정 요인들은 깜짝 놀라며 “용이할진대 아직까지 왜 못 죽였겠소(쉽다면 진작에 죽였지).”라 묻자 > 내가 연전에 [[도쿄도|도쿄]]에 있을 때 어느 날 [[천황]]이 [[하야마마치|하야마]](葉山)[* 일본 [[가나가와현]]에 있는 마을. 황실 별장이 있어 천황 등의 황실 인물들이 자주 왕래했다.]에 간다고 하기에 왕관(往觀, 가서 구경)하였는데 천황이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나에게 총이나 작탄이 있으면 어찌할까’하는 감촉이 얼른 생겼었습니다. 이 취중진담이 천황을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봉창 의사의 취중진담이 있은 지 며칠 후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김구는 그때까지도 이봉창을 온전히는 믿지 못해 자신의 이름을 '백정선'이라는 가명으로 말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봉창은 죽을 때까지 김구의 이름을 백정선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김구]]와 이봉창 의사의 각별했던 모습이 나온다. >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일리 법조계[*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 [[조계]]. '법'은 프랑스의 [[중국어]] 음차 표기인 '법란서'의 준말이다. 임정이 이곳에 있었으며 프랑스 조계는 강대국인 프랑스의 사법권이 미치므로 일본이 간섭할 수 없었다. 임정 인사들은 상하이에서도 여기를 벗어나면 일제 [[밀정(영화)|밀정]]들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중화민국|중국]]에서 항의했겠지만 당시 중국 상황이 여간 개판이 아니었던 탓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 [[백범일지]]에는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동차 위에서 깊이 허리를 숙이고 떠났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