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봉조 (문단 편집) === 결혼 생활 === 노전숙과 열애 끝에 [[결혼]]했으며 [[자식|슬하]]에 1남 3녀를 두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 본부인 몰래 [[가수]] [[현미(가수)|현미]]를 만나 동거하게 된다. 이후 본부인인 노전숙과 가수 현미는 각각 아들을 임신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현미의 첫째 아들과 노전숙의 셋째 아들이 [[동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간통|외도]]가 들통나면서 [[가정|가정 파탄]]에 이를 지경이 되었다. 이봉조는 현미에게 이혼서류를 보여주면서 안심시킨 반면에 혼인신고를 계속해서 미루면서 지속적으로 두집 살림을 해왔다. 허나 이혼서류마저 가짜였다고 한다. [[http://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824656|#]] 결국 한 팬의 전화로 이봉조가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미는 15년 만에 별거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흥분한 이봉조가 다 같이 죽자며 칼을 들고 쫓아왔다고 한다. 사실 1960년대에는 비교적 종종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이혼사유 1위가 (그것도 매우 압도적이었다) 부정행위 또는 두집 살림인 것을 보면...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 적령기 남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사회 전체적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남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여자들이 후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절친이었던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중재로 큰 분쟁으로까진 발전하진 않았지만, 이후 부인이 있는 본가로 들어가지 않고 쭉 홀로 살다가 1987년 8월 31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공교롭게도 2023년 4월 4일 [[현미(가수)|현미]] 역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사망 직전에 현미와 재회해서 다시 합치기로 했으나 그 전에 고독사했다. 재회 당시 비참한 모습을 보고 현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틀니를 끼고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본부인인 노전숙 사이에서 낳은 4남매는 모두 훌륭히 성장하였다. 다들 명문대를 졸업하였고 외모도 출중하다. 아들 이영대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인 22세에 제26회 사법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 유학을 가서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 현재는 서초동 소재 법무법인 수호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광고도 찍을 정도로 미남이다. 이화여대 출신 엘리트인 노전숙처럼 딸들도 명문 이화여대, 숙명여대를 졸업해 의사, 교수, 대기업 임원과 결혼하였다. 사망 이후 이봉조의 가족들이 이봉조 본인이 끝내 본부인 노전숙과의 합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합장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부인의 자녀들이 요구했고 현미 측의 배려로 합장하게 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