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범진 (문단 편집) === 조정 대신 시절 === 이범진은 26세 때 1878년 병과에 급제하며 관리가 되었다. 그는 공조 참판, 호조 참판, 이조 참판, 궁내부 대신, 법부 대신, 고등 재판소 재판장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5년 [[명성황후]] 등과 친러파가 되고 [[을미사변]] 이후 [[춘생문 사건]]을 [[청안군(1851)|이재순]], [[이완용]] 등과 함께 일으키지만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한다. [[1896년]] 귀국해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중심이었던 [[김홍집]], [[어윤중]], [[정병하]]는 돌에 맞아 죽고, [[유길준]], [[조희연(1856)|조희연]], [[장석주|장박]],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우범선]] 역시 일본에서 제거되었다. [[김윤식(조선)|김윤식]]은 은신하다가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김종한]]은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친일 내각이 붕괴하고 새로운 내각이 등장했다. 그는 법부 대신이 되어 당시 법부 대신 [[장석주]]가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을미사변을 철저히 수사했고 이 사건의 배후에 일본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일본 측 인물을 수사하기는 어려웠고 [[적반하장|오히려 일본의 압박을 받아]] 이범진은 정치적으로 불리해졌다. 그리고 이완용과의 경쟁에서 이완용의 승리로 끝나고 그는 완전히 정치권에서 물러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