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범석 (문단 편집) === [[6.25전쟁]] 시기 === || 이름 || 출신경력 || 직책 || 주장 || || [[채병덕]] ||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width=30]]일본 육군 || 총참모장 || 결전 || || [[신성모]] || [[파일:영국 해군기.svg|width=30]]영국 해군 || 국방장관 || 결전 || || [[김홍일(군인)|김홍일]] ||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width=30]]한국광복군 || 육군사관학교 교장 || 지연전 || || [[유동열]] ||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width=30]]한국광복군 || || 결전 || || [[지청천]] ||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width=30]]한국광복군 || 국회의원 || 지연전 || || [[이범석]] ||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width=30]]한국광복군 || 국무총리 || 지연전 || || [[김석원]] ||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width=30]]일본 육군 || 1보병사단장 || 지연전 || || [[이종찬]] ||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width=30]]일본 육군 || 수도경비사령관 || 결전 || 1950년 여름 [[6.25 전쟁]]이 터졌고 [[한강철교]] 폭파를 건의했다.[* 백사 [[이윤영]]의 회고록에 나온다.] 사실 한강철교 폭파는 [[조선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언젠가는 꼭 해야만 할 일이었다. 6월 27일 국방부에서 열린 군사원로회의에서 [[김홍일(군인)|김홍일]] 장군의 한강선 결전을 지지했던 3인 중 1명이 이범석이었다. 오히려 이범석이 일찍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6.25 전쟁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후방 3개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1사단 병력을 한강선으로 집결시켜 결전을 했다면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지금의 6.25 전쟁 초기 서부전선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헌데 군사 경험이 전무한 [[신성모]]가 타이밍도 제대로 안 재고 한강철교를 너무 빨리 폭파시켜 버린 탓에 [[대한민국 국군|국군]]의 물자 및 장비들이 후퇴를 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 사태 한정으로는 이범석 대신 신성모가 더 많은 비판을 받는다. 사실 이범석도 제대로 된 건의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범석이 한강철교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황당하게도 [[배수진|"퇴로가 막혀야 한강 북쪽의 국군이 더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신성모가 한강철교를 너무 일찍 폭파해 버려서 국군을 궤멸시킨 것은 이범석의 건의를 충실하게 따른 셈이 되는 것이다. 창동전투는 배수진과 비슷하였고 이른 폭파로 배수진 따위는 영영 꿈도 꿀 수 없게 되면서 국군은 철교를 전격 우회하였다. 1950년 12월 6일 제2대 주[[중화민국]] [[특명전권대사]]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0120600209101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12-06&officeId=00020&pageNo=1&printNo=8373&publishType=00010|임명되었다]]. 이범석은 [[이승만]]에 대한 열성분자였으며 [[장택상]], [[이기붕]]과 각각 충성 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자는 이기붕이다.]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장택상과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려고 했던 이른바 [[발췌 개헌]]에도 관여했다. 그는 자신이 부산 파동을 일으켜야만 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내가 [[부산]]에서의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매사가 전부 돈이고 국회의 공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통령 임기가 차들어가니 정치적으로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에다 출처 모르는 돈이 들어온다, 생겼다, 어쨎다, 별소리를 다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백척간두에 선 이 나라를 살리는 문제였다.[br][br]⋯ 이 국가가 어떻게 된다는걸 염두에 두지않고 정치적 현실에만 급급하고 중시하여 정권을 미리 생각하고 그 야단들인 것이다.[* 이범석,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둥불 후편》, 1991, 외길사, p. 300] 하지만 이승만 주변에서 강경파들을 떼어놓으려고 했던 미국이 당시 주한미국대사 [[무초]]를 통해 이승만과 이범석 사이를 [[이간질]]했다. 무초는 보고서에 "이승만의 마음 속에 이범석 집단이 이승만 자신과 한국 그리고 [[유엔]]에 대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심어놓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승만과 이범석을 격리시키기 위해 막후에서 노력한 일들이 목적에 달성되었다고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최근 나와의 면담에서 이범석을 비난하는 발언을 한 점이나 [[국무회의]]에서도 이범석이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캠페인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썼다.[* 김일영, '전쟁과 정치',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 출판부] 1951년 8월 31일 [[대만]]에서 귀국하기 직전 [[이승만]]은 이범석의 부인 김마리아에게 사람을 보내 정당을 창당해야 되겠다는 의사를 알려왔다. 그는 [[자유당]]을 창당하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은 민주, 공화당만 봐도 알겠지만 어디 군소정당이 정당 구실을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자유중국]]도 마찬가지다. 국민당 독재라지만 [[국민당]] 이외의 정당이 4~5개가 있으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굵은 자유당이 생기면 최소한 정권의 지속을 싫어하는 반대 세력이 뭉쳐져 큰 정당이 생기고 한 수레에 두 개의 바퀴처럼 한 새의 양 날개 같이 균형이 맞게 움직일 것이다.[br][br]⋯ 왜냐하면 항쟁 과정에 전쟁을 겪으니 전쟁 후에 헌법의 불완전한 점을 우리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평온 무사할 때, 더군다나 정당 정치가 질서가 잡히며 상당히 긴 역사를 지나 정치도의가 제 구실을 다한 다음, 자율 자각으로서 된 다음의 이야기지 간접 선거처럼 민중의 본 뜻이 아니고 위험한 것은 없다. 정당 내의 썩은 자들이 그룹을 지어 묘안을 세우기 위해 물질적으로 허수아비를 세워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당시 부산의 정치 움직임이었다.[* 이범석,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둥불 후편》, 1991, 외길사, p. 304-305]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조선민족청년단]]을 [[대한청년단]]에 흡수시켜야하니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범석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은 이에 맞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 지도자 이범석을 떨어뜨린 뒤에 이승만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던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은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이범석은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 두었다. 결국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 걸 확인해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법률)|고소]]하였다. 그러나 [[무죄]] 판결 이후 족청계 인물들과 [[정변]]을 모의했으나 하필 [[소문]]이 유포되어 실패했다. 장택상은 [[일제강점기]]에 [[경기도지사]]를 지냈던 [[일본인]]이 [[부산광역시]]에 밀입국하자[*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선원을 제외한 일본인들의 입국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고 따로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사실을 조선민족청년단 부하들을 통해 입수한 이범석은 장택상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국무총리직에서 해임시켰지만 이 일로 이범석의 측근 [[양우정]] 등이 희생되었다. 1952년에는 [[자유당]] 원외 부당수에 취임하고 그해 5월 24일부터 7월 22일까지 제8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