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범석 (문단 편집) === 초년기 === 1900년 음력 10월 20일 한성부 중서 수진방 수진궁계 용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서 아버지 [[진사]] 이문하(李文夏, 1872. 9. 10 ~ ?)와 어머니 [[연안 이씨]](1869. 2 ~ ?)[* 이교재(李喬宰)의 딸이다.]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천연동]](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48-1번지로 이주해 [[http://db.history.go.kr/id/im_108_02636|본적을 두었다]]. 1934년에는 [[만주국]] 흥안북분성(興安北分省) 하이라얼(海拉爾)[* 現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후룬베이얼시]] 하이라얼구(海拉爾區).]에 [[http://db.history.go.kr/id/im_108_02636|거주했고]] 1967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서울)|신당동]][* 1975년 [[중구(서울)|중구]]에 이관되었다.] 366-16번지에 [[http://db.history.go.kr/id/im_108_02636|거주했다]]. 그는 [[세종대왕]]의 5번째 아들인 [[광평대군]][* 족보상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망하여 자손이 끊어진 [[무안대군]] [[이방번]]의 봉사손이다.]의 17대손이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조선)|이성계]]의 20대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5대조 이창중(李昌中, 1728. 8. 5 ~ 1781. 3. 17)은 1756년([[영조]] 32)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3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56_023061|입격하고]] [[안성시|안성군]]수(安城郡守, 종4품)에까지 올랐고 증조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253|이목연]](李穆淵, 1785. 2. 28 ~ 1854. 12. 9)은 1821년([[순조]] 21) 정시(廷試) [[문과]]에 병과 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21_012049|급제하고]] [[호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조부 이인천(李寅天, 1845. 12. 14 ~ 1876. 9. 6)은 효력부위(効力副尉) 행(行) 용양위 부사맹(龍驤衛副司猛, 종8품)을 역임한 무관 출신이고, 아버지 이문하는 1891년([[고종(조선)|고종]] 28) 증광 [[진사|진사시]]에 2등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764|입격하고]]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 농상공부 본청 상공국 상무과 기사(技師) 등으로 근무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1911년부터 1919년까지 [[강원도(북한)|강원도]] [[이천군]]수,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양양군]]수,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조사과 촉탁 등을 [[https://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20&totalCount=20&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F%A7%A1%E6%96%87%E5%A4%8F&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F%A7%A1%E6%96%87%E5%A4%8F&searchKeywordConjunction=ANDhttps://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20&totalCount=20&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F%A7%A1%E6%96%87%E5%A4%8F&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F%A7%A1%E6%96%87%E5%A4%8F&searchKeywordConjunction=AND|역임하고]][* 그 밖에도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 기수(技手), 1918년 강원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등을 겸임했다.]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과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받아 [[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에 수록되기도 했다. 한편 이범석은 어릴 때 친모를 여의고 8살 때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여 그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지만 개구쟁이였는데 [[일본]] 헌병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에게 돌을 던지거나 새총을 쏘기도 하는 악취미가 있었다. 하루는 말이 놀라 요동치는 바람에 일본 헌병들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 제국|일제]]는 이범석의 아버지를 소환해 [[벌금]]을 물리기도 했지만 일본 헌병들을 대상으로 한 장난이었는지라 부친은 이범석을 별로 꾸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고도 이범석은 통 장난을 멈추지 않았는데 한 번은 [[뱀]]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에 가서 [[소]]들의 [[항문]]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소들이 놀라 경기를 일으키다가 하나 둘씩 푹푹 쓰러져 그대로 죽었고 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이범석에게 [[도끼]]를 던졌다.[* 위의 건과 달리 소를 대상으로 이런 장난을 친 이번 행위는 그냥 단순한 장난이라고 넘어갈 수준이 절대로 아니었던 것이 당시 소값은 엄청났다. 물론 인명과 소값은 직접적으로 비교 수준이 될 수는 없는 만큼 이건 이범석의 아버지가 더 잘못한 것이 맞기는 하지만 매를 들어 훈계할 수도 있는 문제를 아들의 [[생명]]이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도끼 던지기를 했으니 이범석 아버지의 [[성격]]도 장난이 아니게 불같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어머니 김해 김씨는 어린 아이가 그 정도 장난도 칠 수 있지 않느냐며 이범석을 편들어 감싸 줬고 덤으로 아버지가 던진 도끼를 몸으로 막기까지 한다. 이후 이범석이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집안은 일본 [[경찰]] 감시 하에 놓였지만 새어머니는 그가 [[노숙자]] 생활을 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나 염려하면서 그를 찾아 멀리 만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작 자신이 낳은 친자녀들은 본국에서 일본 감시하에 놓이게 됨에도 새어머니의 지극 정성에 감복하여 이범석은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에게 더욱 각별해졌다.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집안 머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 정태규(丁太圭)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남대문 전투|군대 해산에 저항하다가 죽는 것]]을 보고 항일투쟁을 할 것을 결심했다. 1910년 [[장훈고등학교|사립 경성장훈학교]]에 입학했다가 1911년 아버지가 [[강원도(북한)|강원도]] [[이천군]]수로 발령받자 이천공립보통학교[*A]로 [[전학]]을 갔고 1913년에 졸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