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범석 (문단 편집) == 기타 == * [[흥선대원군]]의 심복이었던 [[이경하]]와 그의 아들인 [[이범진]], 손자 [[이위종]]은 그와 먼 일족 관계다. * 아내 [[김마리아(1903)|김마리아]]와는 1925년에 [[결혼]]했는데 결혼 후 톰스키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혀 8개월 동안 부부가 함께 [[포로]]가 되었다. * [[사냥]]을 좋아했다. [[독립군]] 시절에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종종 나가서 토끼, 꿩, 여우 등을 잡아 동료들에게 [[고기]]를 먹이고 털가죽은 팔아서 군자금에 보탰다는 일화가 있다. ||의장, 부의장 및 국회의원여러분. 상제(上帝)는 정의를 보우하심으로써 우리 민족의 40년 동안 최고 지상의 염원이던 민족자유와 국가독립을 성스로운 선열지사의 부단한 분투노력과 전 세계 평화와 정의를 애호하는 국가의 지지 협조하에 이제 국회를 산생(産生)하였으며, 이 국회에서 고명탁절(高明卓絶)하신 대통령 부통령을 추대하였고, 국회에서 만민의 지침으로 제정한 법률에 의하여 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오직 감격무지하여 마지않습니다. 오늘 천학 비재한 이 사람이 대통령의 간곡하신임명과 국회의원 제위의 엄정하신 승인으로ㅍ국무총리의 중책을 외람히 지게 되어 이 사람으로서는 과분의 영광을 느끼는 동시 그 책임의 중대와 전도에 가로놓인 거대한 임무를 생각할 제 일개 군인으로서 평생을 지나온 나로서는 부담이 너무 크고 어려운 것을 심심히 느끼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국제적으로 국내적으로 정세의 긴박한 수요에서 나의 엄연한 지령인 것을 알고 오직 대통령 부통령의 의지를 승승(乘承)하여 국회, 즉 우리 민족 전체의 협조를 얻어 이 중임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국외 국내에 허다함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권의 완전한 회복, 거족적 단결의 구현, 생산 없는 산업, 혼란과 경제, 불감침공(不敢侵攻)의 국방, 민족문화의 현양(顯揚), 과학의 발달 등등 지대 무한한 것으로 재인식할 때 오직 민족 전체의 요구와 우리의 자활책에 의거해서 나의 가지고 있는 충성 정력 시간과 생명을 민족과 국가에 바칠 뿐입니다. 이로서 총리에 취임하는 인사를 삼으랴 하며 여러분의 두터운 협력과 지교(指敎)를 바랍니다. 초대 국무총리 취임사||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장준하]]는 이범석에 대해 "좌파 냄새가 난다"고 부정적으로 평했다.[* [[파시즘]] 지도자들 중에는 사회주의 정당 출신(대표적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이나 좌파 성향을 갖고 있다가 [[극우]]로 전향한 인물이 많다. 파시스트가 서구식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에 맞서서 사회공동체의 혁명을 추구할 때 공산주의식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 대신에 민족혁명을 내세우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에겐 파시즘이 공산주의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리버럴에서 리버테리안 사이에 위치한 지식인인 장준하가 보기에는 못마땅했던 듯하다. 한편 장준하는 이범석과 족청에서 함께 일하다가 이범석의 좌익들을 끌어들이려는 행보가 마음에 안 들어 족청을 조용히 떠난 적이 있다. 그러나 사상에 대한 회의감과는 별개로 장준하는 사망 직전인 1975년 여름 몇 년 전 별세한 이범석의 묘지를 방문하는 등 이범석을 여전히 독립군 시절 상관으로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이범석은 좋고 싫음이 분명하며 호탕한 편이었다고 한다. 술과 담배를 즐겨하고 평소 사적인 담소를 나눌 때 거친말을 잘 쓰곤 했는데 존경하는 독립운동가나 김준엽처럼 좋아하는 부하에 대해선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 한국군 인사들 중에서 [[무기]] 개발 경험이 있는 장성급 인사다. 중국군 시절 소병문 휘하에서 장갑열차를 손수 설계, 운용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일본군의 장갑열차 등을 참고했겠지만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무기 개발을 시도하고 운용까지 한 몇 안 되는 사례다. 장갑열차의 구조는 무개[[화차(철도)|화차]]를 개조하여 이중으로 널판지를 두르고 이를 레일을 박아 고정한 뒤에 널판지 사이에 흙과 자갈을 채우고 지붕에도 레일로 구조를 잡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일종의 참호 형식이었다. 전간기 화력 수준에서는 상당한 방어력을 지닌 셈이었다. * [[한국어]]를 포함해서 '''6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학]]적 소질도 있었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는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미군, 중국군, 소련군 소속 장교로 활약할 정도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으며 [[일본어]]와 [[독일어]]까지 아주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10927&mediadtl=23704&gbn=MH&quality=W|김마리아 여사 장례식]] 영상을 보면 조문 온 미국 대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하지만 당대에 나치와 맞선 [[샤를 드골]]을 존경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방일보]]에 연재되는 전기 시리즈에 따르면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 선전 방송도 즐겨 들었다고 한다.[* 드골도 정도는 덜했지만 만만치 않은 권위주의적 지도자였다. 드골주의에서 [[신대통령제]]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1947년 5월말, 미국 신문 기자단은, 서울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옛 성곽 도시 수원에 있는 대한 청년단의 훈련 학교를 우연히 찾아갔다. > >이 운동의 지휘자는 이범석이었는데 그는 일제 시대 김구의 광복군 참모장이었다. 1947년 7월까지 약 7만 명이 수원 훈련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1947년 말까지 10만 명의 훈련생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수원 훈련 학교 교장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히틀러 청년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것을 신문 기자단은 알게되었다.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신문 기자단은 "Sprechen Sie Deutsch?"(독일어 할 줄 아십니까?)라는 인사를 받았다. 그와의 계속된 대화를 통해서 그 조직이 [[히틀러 유겐트]](Jugend)를 본따서 만들었으며''', 조직의 목적은 남조선 국군을 양성하여 '광복군의 영광스런 전통'을 계승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훈련 학교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기관이지만, 김구가 상임 교관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다양한 정치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똑같은 사상을 가지고 나간다는 정보도 그는 스스로 제공했다. >---- >리처드 D 로빈슨(한국 미군정의 대민 정보 수집 분야에서 일했고, 이후 제24군단 사령부의 정보과에서 점령기를 다룬 전사 편찬 업무를 맡음.), 미군의 배반, 과학과 사상, 1988년, 215 - 216 >오후에 연락원은 우리를 또다른 "신사"인 한국 민족 청년단(족청)의 단장이며 극우 진영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는 이범석 장군에게 데려다주었다. 나는 줄창 그의 이름을 들어왔었고, 몇몇 미국인들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나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 >우리는 미군이 한국 민족 청년아 베당해준 2층 건물에 자리잡은 본부에서 그를 만났다. 이는 좋은 체격의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의 얄팍하고 굽은 코와 빈약한 콧수염이 기묘하게도 호전적인 인상을 풍겼다. > >그는 말했다. "오늘날의 한국은 1919년의 독일과 같소.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민족적 불화, 경제적 곤궁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요. 청년들의 단결이 민족 해방의 관건이 되오. 지도자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명령에 복종하는 것, 실천적인 능력의 함양과 도덕심의 회복 등을 고육하려 하고 있오." >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점차로 내가 한국의 한 민주주의 조직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히틀러의 저 악명 높은 "지도자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민족, 사명, 규율, 인내 등의 단어들이 우선동일했다. > >이범석은 예정된 커리큘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역사학, 윤리(이범석 자신이 강의할 예정이었다.), 정치학 등이었다. "파업 분쇄 방법도 가르칠 거요. '''히틀러의 유겐트의 역사도 물론." 그의 핵심 참모 중에는 3년 동안 히틀러 유겐트의 열렬한 멤버가 되었던 사람이 있다.''' > >---- >마크 게인(동북아시아통의 저널리스트. 마크 게인은 1946년 10월 15일에서 1946년 11월 7일까지 한달 남짓 한국에 머물면서 서울, 개성. 옹진, 부산, 동래, 대구 등을 취재함.), 해방과 미군정, 까치출판, 1986년, 118 - 120 (본 부분은 1946년 11월 7일 서울에 갔을 때 일기임. -115쪽) * 두 사람이 증언한 이범석의 핵심 참모이자 수원훈련학교 교장인 나치 추종 인물의 정체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가 후지이 다케시 박사가 관련자들의 경력을 조사해 본 결과 [[강세형]]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는 [[김삼순]] 박사의 남편이자 [[이회창]]의 이모부다.[* 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지도 교수 : 서중석, 학위 논문(박사)--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사학과 2010년 8월] 이렇게 나치를 좋아했다고 [[독립운동]] 전적까지 비판하는 이들이 많은데 과연 이게 타당한 견해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아예 [[소련]]에 대항해 독립을 부르짖던 이들이 [[독일 국방군|나치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고 상당수가 독일군에 참전했던 사례가 있다. * [[기병]] 병과 출신답게 [[말(동물)|말]]을 즐겨 탔으며 국방부장관 시절에도 말을 타고 서울시내를 돌아다닌 영상이 남아 있을 정도다.[* 당시에는 [[경찰]]에 기마대가 존재했고 국군에서도 [[장철부]] 소령이 [[6.25 전쟁]] 당시 마지막 기병대를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슈탈헬름]]을 착용하고 말을 탄 [[사진]]도 남아 있다. 보통 이런 자리로 올라서면 [[수행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딸려나와서 그걸로 출퇴근을 하거나 외부로 이동하거나 업무를 보는데 이범석은 그것들도 마다하고 아침마다 말을 타고 [[청와대|경무대]]에 출근하기도 했다. [[파일:이범석기마.jpg|width=400]] * 1990년대 초반 비밀 해제된 [[주한미군]] G-2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상당히 싫어했는데 전시 작전권이 미국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이범석이 [[대한민국 국방부]]에 정훈국 창설과 대북 첩보 수집 및 교란국 창설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군에서는 이를 분리 공작 의도로 보며 경계했으며 미국측의 시각으로는 "극단주의에 빠진 중국 [[군벌]]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범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계엄령 선포는 각의에서 논의가 되었다. 내무부 장관이 된지 약 1주일쯤 되었을성 싶고 그때가 [[발췌 개헌|금정산 사태]]의 발생 시기니 상당히 중요했다. 그 당시 야당에선 [[계엄령]]을 선포해서 강압적으로 이 대통령을 재선시킬 목적으로 헌법을 뜯어고치려고 금정산에서 쇼를 했다고 말한다. 쇼로 금정산에서 [[미군]]을 죽였다고... 나는 참으로 나라위해 일생 피투성이로 싸우던 사람으로선 도무지 상상조차 못하겠다.[* 이범석, 《철기 이범석 자전 : 우둥불 후편》, 1991, 외길사, p. 315-316] * 당시 부패한 [[정치인]]들과 달리 재산을 부정축재한 것 없이 깨끗한 생활을 했다.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운영할 때도 기부금에 의존해서 어려운 운영을 했고 [[국무총리]]까지 했으면서도 치부한 게 전혀 없어 은퇴 후에는 서울 변두리 지역을 전전했다. [[중화민국]] 대사 재직 당시에는 대사관 경비를 총 5백불로 아껴서 사용했는데 보다 못한 [[장제스]]가 자국 장군의 사택을 지원해 줬을 정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때는 [[쿠데타]] 진영에서 이범석을 친이승만 계열로 보고 지원을 끊어버려 국가 원로가 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도 없어 4일을 굶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 [[박정희]]가 [[만주군]] 중위라는 과거 전력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 군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범석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점과 함께 광복군 참모장에 있었던 이범석이 박정희를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에[* 이는 비단 박정희에만 국한된 일도 아니었다. 광복군, 독립운동가 출신의 [[군인]]들은 광복 후 자주 국방 및 치안 수립을 우선 선결 과제로 보았기에 일본군 및 만주군 세력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신생 조국의 창군에 동참하여 속죄하라"는 명분으로 끌어들이려 노력을 했다.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 창설을 위해 만주군 출신의 [[신현준(군인)|신현준]]을 데려오고 마찬가지로 공군의 아버지인 광복군 출신 [[최용덕]] 장군이 [[김정렬(1917)|김정렬]] 등의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들과 협력한 것도 바로 그 일환. 박정희 본인도 해방 1달 뒤 광복군에 들어가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때까지 활동했기에 자연스럽게 광복군 내에 [[인맥]]이 생겼다.] 이범석의 살아생전에는 박정희의 어두운 과거사가 그렇게 문제되지 않았다. 반공과 자주 국방을 주장한 박정희와 통하는 측면이 많아서 그런지 박정희가 엄청 띄워줬다.[* 정작 제3공화국 당시 이범석은 야당 인사로 활동했다. 그나마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위촉되었으나 이조차도 명예직이었고 [[강원룡]] 등 친여계가 아닌 인사들도 포함되었다.] *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농림부장관 [[류병현]]이 박정희를 대신해 이범석에게 당선 인사를 하러 가자 이범석이 상석을 양보하며 대통령 특사로 왔기에 상석에 앉으라고 했다고 한다. 후일 류병현은 이를 증언하며 이범석은 사리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 주 중화민국 초대 대사인 우창 신석우가 첫번째로 결혼한 아내 이범숙은 이범석의 누이다. * 2016년 11월 8일에 진수된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의 8번함이 '이범석함'으로 명명되었다. 앞서 진수된 손원일급 4번함과 7번함은 역시 [[청산리 전투]]에서 함께 활약했던 [[김좌진]], [[홍범도]]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 [[나무위키]]와 [[위키백과]] 등지에는 이범석이 대종교에서 침례회로 [[개종]]했다는 서술이 있었는데 이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아내 김마리아와 동생 이범승은 진짜 침례회 신자였으므로 개종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내 김마리아의 장례식 영상에는 [[승려]]들이 나와 불교식으로 법문을 외우는 모습이 나온다. * 국방장관 당시 이범석을 수행했던 예비역 준장 [[황헌친]]의 증언에 따르면 성격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다만 황헌친 본인은 족청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았고, 창군기에 국방경비대가 족청으로 대체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에 대해 국방경비대측에서 반발을 했다고 하였다. 이범석이 국방장관에 경질된 이후 족청 계열에 대해서 군 요직 차지에 차별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 출신인 [[황의선]]은 광복군 출신이라서 받은 차별 대우는 딱히 없었지만 육사 특 7기와 8기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다고 증언하였는데 특 7기&8기에 족청, 대동청년단 등 청년단체 출신들이 다수 참여했기 때문에 족청 파벌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