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박사 (문단 편집) === 데뷔 전 === 국악인이었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박사의 아버지인 이 모 씨는 근동에서 유명한 국악인이며, 이박사의 어머니도 목청이 좋을 정도로 소리를 잘 낸 국악인이었다고 한다. 이박사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세는나이 기준으로 61살이었으며,[* 이박사의 아버지는 [[1894년]]생이다.]아버지의 별세도 객지에서, 그것도 이박사가 갓난아기 시기에 맞이해서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요]]를 시작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5살 때부터 [[록 음악]]에 심취하더니 [[부모님]]으로부터 경기도 민요까지 접하였다가, 결국 19세에 들어서 [[뽕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관광객들에게 안내와 더불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 시대의 관광버스에는 리듬 박스라는 일종의 [[드럼머신]]이 장치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걸 틀어놓고 그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나중에 전자 음악과 잘 어울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는 경우도 있다. (초기 맹인 키보디스트와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사용하던 야마하, 인켈 키보드에는 간소화된 드럼머신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그것을 활용하여 bpm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공연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키보드, 신디사이저로 음악을 시작했으니 전자음악에 대한 조예와 느낌을 체득했음은 자명한 일)) 유년 시절 경기민요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 중간 중간에 독특한 [[추임새]]를 넣어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임새는 현재까지도 '이박사'하면 먼저 떠오르는 그 만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보통 뽕짝이라 칭하는 구전 트로트 스타일 + 민요에서는 짤막한 추임새를 가끔 넣으면서 흥을 이끄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박사는 이 단편적인 추임새를 기반으로 추임새 자체로 "싱잉"(?)을 하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과 그루브를 보여주었고 한창 이박사가 유명세를 타던 시절 방송에서 이박사 모창을 시도한 연예인, 일반인들이 있었지만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당시, [[문화방송|MBC]] [[인간시대]]에 '신바람 이박사(1989년 11월 13일 방영)'라는 제목으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머리 속에 넣고 있는 노래가 3,000개였다고. 또, 이박사의 노래를 틀어 놓고 즉석에서 도너츠를 반죽해서 만드는 분의 사연도 '춤추는 도너츠'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방송은 이쪽이 먼저다. 참고로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기 전에는 양복점을 운영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만 두고 노래 부르면서 일할 수 있는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전의 일을 보면 세는나이로 17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요정에서 3개월 동안 잔심부름일을 하였고 양복점 시다 3년을 했다. 그 후 이발소 시다, 우체국 편지배달, 중국집 음식배달, 다방 심부름, 당구장 등의 일을 전전했다. 세는나이로 20살, 만 19세가 된 해인 1973년 5월 KBS에서 민속백일장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지역예선에 입상을 해 서울로 올라가 본선 참가를 했지만 본선에서 망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1년을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양복점 시다와 요정 아가씨를 상대로 창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76년 이후 아예 양복점을 세차례나 경영하면서 두차례 망해서 남의 양복점 가서 일하면서 돈모으고 세번째 양복점을 개업했는데, '''영 재미가 없어서''' 자신이 개업한 양복점을 남한테 넘기고, 친구 빚 갚아주고 노래 부르면서 일할 수 있는 관광버스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C%9D%B4%EB%B0%95%EC%82%AC&oldid=28579905|위키백과 문서에 1977년 군 전역 후 관광버스 가이드 생활을 시작했었다고 나온적이 있었지만]] 이박사가 병역을 마치고 관광버스 가이드 생활을 시작했다는 내용은 [[방위병]] 복무만으로 보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이박사가 청년시기였던 1970년대의 배경을 보면 당시의 청년층 인구가 많아 병역자원이 넘쳐나던 시기였으며, 이 영향으로 인해 현역병 입영대상이 50%도 안되고 방위병 소집이 되거나 장기대기로 병역이 면제되는 경우도 많았던 시기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박사의 학력, 당시의 키와 체중에 의한 병역판정기준으로 이박사가 관광버스 가이드가 되기 전에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병역을 마쳤거나 장기대기로 인한 소집면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기간 동안 일자리를 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박사처럼 1954년생이 주요 대상자였던 1973년 징병검사에서 초등학교 졸업자는 갑종(1급)만 현역, 1~3을종(2~4급)은 당시 방위병 소집대상이던 보충역이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것은 태진아도 비슷하며, 태진아는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쳤다.] 2001년 자서전을 냈다. 제목은 '이박사 - 한번 만나볼까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