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명하 (문단 편집) === 보합단 === 1920년 9월, 이명하는 [[박초식]] 등 일부 대한독립단원과 함께 의주군 비현면 정산동 김중량(金仲亮)의 집 뒷산에 있는 굴에서 성립된 보합단에 가입했다. 그는 보합단원들과 함께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안평동의 박초식의 집에서 폭탄을 제조하고 이를 가지고 가서 용천, 의주, 선천 등지에서 부호들을 위협해 군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밀정 등을 숙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거지가 발각되자, 그들은 2개의 대열로 나뉘어 타지로 이동해야 했다. 이명하 등 보합대원들은 일제의 추격을 받으며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가까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후 사방으로 흩어져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명하는 중국 안동 지역으로 가서 한인들을 설득해 독립군에 가담시키려 애썼다. 그러던 1921년 2월 2일, 이명하와 백학원, [[안중석]], 김근배, 박초식 등은 안동현 삼도구만에 와서 군수품 등을 마련하다가 일본 영사관 분관의 한 관원 경찰의 검문을 받자 그를 사살했다. 이후 그들은 출동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경찰 오카무라[岡村] 경부보(警部補)와 한인 순사 주계주(朱啓柱, 혹은 朱桂守)를 사살하고 수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평안북도 제3부 경찰대와 의주 경찰서에서 다수의 지원대를 파견했고, 안동현에서도 수명의 경관을 파견해 지원했다. 결국 보합단원 7명 중 3명이 피살되었고, 이명하 등 생존 단원들은 다른 대원들이 은거하고 있던 구련성 부근의 소운수(蘇雲樹, 혹은 蘇雲朱)라는 중국인 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뒤를 추격하고 있던 일본군 탐정이 이들의 은거지를 알아냈고, 의주 대안에 있던 평북 의주경찰대와 평북 제8부 경찰대 30명이 습격했다. 이에 이명하와 다른 대원들은 소운수의 집을 요새로 삼고 집을 에워싼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1921년 2월 2일 전원 사살되었다. 이후 이명하의 시신이 어느 곳에 매장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명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전주 이씨 광평대군파]][[분류:1878년 출생]][[분류:1921년 사망]][[분류:전쟁 사망자]][[분류:광주시 출신 인물]][[분류:건국훈장 독립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