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만기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80년대 초중반 민속씨름을 국민 스포츠로 흥행하게 만든 프로씨름의 원조 레전드'''다. 초창기에는 한라급 체급으로 시작해 백두급 선수들을 제치던 선수였고 [* 이 당시 한라급은 체중 85~95kg, 백두급은 95kg 이상 무제한이었지만, 대체로 가장 무거운 선수는 120~130kg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그 전성기 그의 신체조건은 180cm, 105kg였다. 사실 천하장사=백두장사의 공식이 보통 성립될 정도로 백두급이 천하장사를 하는 씨름판에서 한라급인 선수가 백두급 선수들을 상대로 이기고 천하장사로 등극했다는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의 업적이다. 게다가 그 때는 기술보다 힘과 체중에 많은 비중을 두는 씨름이 대세였기 때문에 이만기의 전설이 더더욱 빛난다.], 이후 백두급으로 체급을 올린 뒤 '''[[씨름/체급#s-2|천하장사]] 총 10회'''를 기록하며 씨름계의 전설이 됐다. 백두장사 18회 [* 최다 기록이었으나 이후 이태현과 타이를 이뤘는데 [[이태현(씨름)|이태현]]이 은퇴 이후 복귀해서 2회 백두장사를 더 기록하여 20회로 기록이 깨졌다.], 한라장사 7회까지 포함하여 각종 공식대회에서 도합 47번의 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통산 전적은 345전 293승 52패([[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0091700209215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9-17&officeId=00020&pageNo=15&printNo=21243&publishType=00020|승률 84.9%]])로, 역대 모든 씨름 선수들을 통틀어 최고 승률의 기록을 보유했다. 1회 천하장사 대회 때 [[최욱진]] 장사 [* 당시 105kg의 거구 선수로, 심지어 최욱진 장사는 이틀 전에 다른 경기에서 이만기 선수를 이긴 상황이었다.]와 2:2 상황 접전까지 갔고 마지막판에서 호미걸이로 제압하며 초대 천하장사가 된다. [* 이 때도 그렇고 커리어 내내도 그랬지만 이만기의 주특기는 그 탈인간급의 힘에서 나오는 들배지기였고, 호미걸이라는 기술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판 전까지 한 번도 시합에서 써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舊 [[국민학교]] 現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단 한번도 개인전에서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첫 우승이 천하장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앞으로 어떤 엄청난 씨름 선수가 나오던 절대로 깰 수 없는 기록인 '''초대 천하장사'''의 타이틀을 가져갔다. 원래 중간급인 한라급 출신이라 화려한 기술 씨름을 구사한 데다가[* 1만가지 기술을 가졌다 하여 이름이 '만기'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별명 유래가 1만가지의 수를 쓴다는 뜻의 '만수(萬手)' 별명을 가진 [[유재학]] 감독인데 1만가지의 기술을 뜻하는 만기의 한자 표기는 萬技로 이만기 본명의 한자 표기인 萬基와는 마지막 글자가 다르다.] 경기에서도 깨끗하고 매너있는 자세로 씨름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다가 백두급으로 올라가면서 화려한 기술 씨름에 덩치와 힘이 붙으면서 사실상 압도적인 수준으로 장기 집권을 했다. 실력 외적으로도 군살이 없는 근육질 몸매를 가졌고 [* 심지어 백두급 선수 시절에 복근까지 있었다. 당시 백두급은 무제한급이었는데 그런 선수에게 복근이 있다는건 그만큼 타 백두급 선수보다 몸무게가 덜 나간다는 소리이다. 그 체격으로 본인보다 체중이 더 많이 나가는 선수들을 모래판에 메다 꽂고 다녔다. 그때 당시 이만기와 겨뤘던 최욱진, 홍현욱 등 백두급 선수들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모두들 스모 선수들처럼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고 힘은 정말 엄청났으나 대부분이 복근이나 근육질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려하면서도 순진한 외모를 지녀서 씨름계를 넘어 스포츠계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여배우들과 스캔들도 많이 났었고, 강한 힘의 심벌 때문인지 여성들 특히 아주머니들한테 인기가 매우 많았다. 나중에는 여성 속옷 광고에 나오기도 했다. 단, 이 여성 속옷 광고는 '이만기가 아내의 속옷 사이즈를 기억했다가 딱 맞는 속옷을 사준다'는 컨셉의 것으로 씨름선수의 힘과는 크게 상관 없는 애처가 설정을 내세웠다. 캐치프레이즈는 "아내에게는 저 이만기도 넘어갑니다."인데, 실제 부인과 출연했다. 어르신 세대의 천하장사에 대한 호감 이미지는 전부 다 이만기 한 명이 쌓아올린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역 선수 시절 당시 205cm의 거인 씨름선수 '인간 기중기' [[이봉걸]],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등과 3이(李)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봉걸과 이만기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비유되며 장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 또 다른 라이벌인 이준희와의 결승 대결도 매번 치를 때마다 지금의 야구나 축구 더비 못지않은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1980년대 당시 이만기의 인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만기를 몰라야 [[서울대]]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즉 이만기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세상과 담 쌓고 공부해야 명문대 간다는 뜻이다. 비슷한 얘기로 [[사법시험]] 합격자가 [[조용필]]이 누구냐고 물어봤다거나 [[199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오승은(1980)|역대 최초로 만점을 받은 학생]]이 "[[H.O.T.]]가 뭐예요?"라고 물어봤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씨름의 최고 인기 시절에 워낙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기에 이렇게 한 선수가 계속 독식을 하면 씨름판이 재미가 없어진다는 이유로 프로씨름을 주관하던 한국씨름연맹에서는 이만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판부터 이만기에게는 박한 판정을 주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심지어 이만기가 왼손잡이인 것이 강함의 이유라고 오른손으로 잡는 허리샅바를 먼저 잡고 왼손으로 잡는 다리샅바를 나중에 잡도록 프로대회 규정을 바꿨으며, 키가 작은 이만기를 견제하기 위해 원래 무릎을 꿇고 앉아서 샅바를 잡고 일어나서 시작하던 것을 일어난 상태에서 샅바를 잡고 시작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계속해서 이만기가 우승을 하자 결국 원래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만기가 판정 때문에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사례가 있는데 1985년 10월 4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8대 천하장사 씨름대회 중 라이벌 이준희와의 결승전 때의 일이다. 이만기가 첫 판을 이기고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두 번째 판이 열렸는데 이준희의 팔이 먼저 땅에 닿았음에도 심판은 이준희가 이겼다고 오심을 내리면서 1:1이 됐다. 이때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는데 이어 벌어진 셋째 판에서 이준희가 밀어치기로 이만기를 제압하며 2:1로 전세가 역전됐다. 그러자 격분한 이만기와 황경수 감독이 모래판을 뛰쳐나가 락커룸으로 향했다. 그러자 경기를 진행하는 연맹 측은 오히려 이만기를 향해 격분했고 이만기가 장외로 나간 시간이 기권 여부를 가리는 시간 기준인 4분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2분여쯤 흐르자 이만기가 기권을 했다고 판단하고 이준희의 천하장사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만기는 자신이 장외로 나가면 관중들이 웅성거릴 것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분위기가 형성되면 다시 나가서 겨뤄보겠다는 심산이었는데 막상 나가니 이미 판은 모두 끝나버렸고 이준희가 꽃가루 세례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필 이 장면은 '''전국으로 생중계 됐고'''[* 1980년대 중반까지는 프로씨름의 인기가 프로야구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났다. '''무려 [[KBS 뉴스 9|메인뉴스]] 시작마저도 지연시킬 정도'''로 당시 씨름의 대중적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이만기는 씨름연맹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당시 천하장사 1품(준우승) 상금이 1000만원이었는데 그걸 벌금 목적으로 몰수해버렸고 [[괘씸죄]]의 죄목으로 1000만원의 벌금을 추가 부과했다. 결론적으로 2000만원의 손해를 본 셈인데 이 당시 강남구 일대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2000만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중앙 일간신문에 사과 광고까지 내라는 벌칙까지 받았다. 결국 이만기가 수천만원 상당의 금전적 손해를 보고서야 사태는 일단락됐는데 이후부터 이만기와 씨름연맹 간의 사이는 좋지 않게 흘러갔고 훗날 씨름계 주류와 이만기가 갈등하는 일까지 확산된다. 이 당시의 이야기는 예능인 [[무릎팍도사]]에서는 그냥 넘어갔지만 보통 언론 매체와 인터뷰 때는 꼭 이 [[흑역사]]가 들어간다. 특히 2011년 KBS를 통해 방영된 '천하장사 만만세' 2부에서는 이 경기 내용이 상세히 다뤄진다. 당초 본인은 천하장사 통산 10회 달성 뒤 씨름계의 정점을 찍고 최고의 자리에서 은퇴하려던 것이 목표였으나 그의 인생에 발목을 잡은 선수가 1989년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전직 씨름왕이자 현재 국민 MC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모래판의 악동" '''[[강호동]]'''이었다. 다만 이 당시 이만기는 이미 은퇴를 준비하던 상태였고 [[인제대학교]] 교수로 임용이 된 상황이었던데다 후배 선수들인 황대웅, 김칠규 등도 이만기만큼이나 정상권에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더구나 당시 강호동의 체중은 130kg로[* 강호동 본인이 1박2일 백령도편에서 '현역보다 20kg 이상 체중이 빠졌다'라는 발언을 했었고 현재 체중은 약 110kg 남짓임을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엔 130kg을 상회하는 체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만기보다 더 무거웠고 나이 면에서도 20대 후반의 이만기보다 10대 후반의 강호동이 앞섰던 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은퇴 준비시기라고해도 아직까진 27세의 한창 나이였던 이만기가 그렇게 쉽게 당할수 있느냐는 의견도 많았다.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의견이 도는 중인데 먼저 두 사람 다 역대 최고를 다투는 씨름 선수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서로 간의 장단점이 갈리는 터라 상성 상으론 강호동이 유리한 편이었다. 이만기의 장점이라면 장기 집권을 해온 천하장사로서의 경험과 최고 수준의 테크닉을 꼽을 수 있는 반면, 강호동은 체격이 워낙 좋은데다 유연함과 힘이 뛰어나고 나이도 젊었던 탓에 피지컬 쪽에 강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강호동은 이만기를 롤 모델로 삼고 중학교 시절부터 이만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자랐다고 했으니, 같은 프로로서 붙을 때도 분석이 잘 되어 있는 강호동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강호동은 황경수 감독의 스카웃을 받고 마산중으로 전학 와 씨름을 배웠는데 이 당시 이만기도 황경수 감독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강호동은 이만기 집에서 하숙하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이만기와 강호동은 사형과 사제 같은 관계였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이만기와 강호동의 매치업은 강호동이 우위를 가져가는 모양새였지만, 반대로 이만기는 강호동이 죽을 못 쑤고 밀리던 [[이봉걸]]을 상대로 상성을 발휘했다. 이렇듯 각자 간의 상성이 있으니 상대 전적만으로 따지기엔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편. 확실한 것은 강호동과 이만기 둘 다 역대 최고를 다툴 만한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였다는 것 뿐이다. 이후 이만기는 복수전에서 제대로 [[강호동]]을 이기고 1991년 3월 14일 은퇴를 하였다. 1990년 천하장사 4강전에서는 '''"깝치지 마라, 이 새끼야."'''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했다.[* 방송에서는 '''깝죽거리지 마라'''로 약간 순화(?)되어 알려져 있다. 이때 강호동 본인이 얘기했지만 2초 동안 당황해서 벙쪘다고 한다. 하지만 강호동의 당황은 잠시뿐이었고 곧바로 심판한테 상대 선수한테 이 새끼 저 새끼 욕을 박아도 되는 거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youtube(2LQNCzbOuFc)]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