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란인 (문단 편집) === 이란인과 이슬람 === 이란인, 곧 페르시아인은 원래 [[무슬림]]이 아니었으며 외세에 의해 [[이슬람]] 개종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그나마 이란에선 아랍이 거의 믿는 [[수니파]]가 아닌 시아파를 믿은 것도 아랍과 같은 믿음을 가기 싫다는 뜻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아파에서 2대 이맘으로 숭상하는 [[후세인]]은 '''전승에 따르면''' 사산 제국의 마지막 공주와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3대 이맘 알리 알 사자드부터 12대 이맘까지 이어지는 계보에는 선지자 무함마드와 페르시아 황실의 혈통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계도가 얼마나 실제 역사와 가까운지는 족보라는데 흔히 그렇듯이 단정짓기 힘들다.] 하지만 이는 이란 역사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해석일 수 있다. '''[[시아파]]가 이란의 주류 종파가 된 건 16~17세기 [[사파비 왕조]] 이후이다.''' 중세 내내 이란은 하나피파의 시조 아부 하니파가 페르시아어로 쿠란을 번역한 사례에서 보듯 [[수니파]] 중에서도 현지 관습법을 중시하는 [[하나피파]]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셀주크의 명재상 [[니잠 알 물크]]나 수니파와 수피들에게서 위대한 학자로 공인받는 [[알 가잘리]] 역시 페르시아인이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순니파라고 해서 아랍인들에게 마냥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다. [[샤나메]](제왕의 서)를 집대성한 [[호라산]]의 페르시아인 시인 [[피르다우시]]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아랍인들은 도적처럼 이 땅에 몰려왔으나 우리에게 참 종교를 주었다."[* 이 말은 이란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랍에 대한 애증을 담은 표현으로 자주 인용된다. 페르도우시는 이슬람화된 이후 최초로 이슬람 이전의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인물로 페르시아 민족주의의 기원으로도 여겨진다.] 물론 이란의 골수 민족주의자들은 [[조로아스터교]]야말로 진정한 페르시아인들의 종교라고 밀고 있다. 심지어 이란 신정 정부 치하에서도 쉬아파 이슬람에서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꽤 나왔으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과 다르게 따로 대놓고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이란 신정 정부가 이들을 관용한 것이라기보다는 후술한 대로 언론의 이목이 가지 않게끔 하는 의도가 더 컸다.] 이런 이란인 골수 민족주의자들은 이란의 지도자들을 골치 아프게 하는데, 그 이유는 이란 사람들이 워낙 페르시아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며 조상들의 고유 문화를 숭상하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는 골수 민족주의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자니 대놓고 국법에 어긋나고, 처벌하자니 국제 사회의 이목이 쏠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란 지도부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탄압하던 것과 다르게 그냥 대놓고 무시했다. 이 골수 민족주의자들이 뭐라고 하건 그냥 상관 안 했고, 실제로 젊은층 사이로 이란을 갈아 엎을 기세이던 이 운동은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자 그냥 아무 것도 달성 못하고 끝났다.[* 비슷한 경우가 [[그리스]]에도 있다. [[정교회]]를 믿는 대다수 인구와 그리스 기득권에 반발하면서 원래 그리스인은 [[그리스 신화]]로 알려진 [[제우스]] 등 여러 신을 믿는 민족주의자들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이란인들 중에는 페르시아인의 후예라는 자부심 때문에 보수적인 늙은 사람들도 '위대한 선지자인 무함마드가 나온 아랍인이 우월합니까? 아니면 고대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페르시아인이 우월합니까?' 질문하면 십중팔구 '페르시아인이 당연히 더 우월하지, 그리고 우리는 그 페르시아인의 후손이고.'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들이 그 근거로 드는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교우였던 페르시아인 [[살만 알 파르시]]이다. 이 정도로 이란인들은 페르시아인의 후손이란 자부심이 크며 정작 자신들은 이슬람 율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체제를 본인들도 알고 있지만, 수백년 시간이 흐른 뒤라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냥 적응해서 살고있다. 이에 대해서 아랍인들은 '결국 종교에서 아랍인인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굴복한 주제에 뭔 페르시아 대제국 운운하냐?'고 비웃는 건 물론이다. 이런 비아냥에 대하여 이란인은 비록 종교는 이슬람으로 바뀌었을지 몰라도 문화 측면에서 페르시아는 아랍 정복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근동 전반의 문화와 학예가 형성되는 데 있어 그리스-로마 문화와 더불어 막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이슬람은 페르시아를 정복하였지만, 페르시아 문화는 이슬람 문명을 정복하였으며, 그나마 너희들이 대다수인 수니가 아닌 소수 시아파를 믿으니 같은 이슬람이라도 니들과 다르다고 애써 항변 중이다. 다만 이슬람 학문과 문화 대부분이 이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명은 정확한 것이 아닌게, 중근동 전반의 문화와 학예가 확립된 곳은 오늘날의 이란 영토보다는 고대부터 대학 문화가 융성했던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과거 불교 지역이었던 중앙아시아는 무역상들이 시주를 하고 승려들은 시주 받은 돈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초창기 형태의 대학이 생겨났는데, 그중 대표적인 대학이 아프가니스탄의 [[발흐]] 근교의 나우바하르 대학이었다. 물론 이 지역들에서 이슬람화 이후에는 학술 용어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쓰였다. 유의할 점은 중앙아시아 학자들이 사용한 중세 신페르시아어는 현대 이란의 페르시아어보다는 [[타지크어]]/[[다리어]]에 가까웠다.] 등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전통적으로 호라산과 이란 접경 지역에 위치한 [[니샤푸르]]가 있는데, 니샤푸르는 도시 건설 초기부터 로마인이나 그리스인 전쟁포로들이 많이 정착했고, 이들의 후손들 중에서는 [[그리스어]]를 페르시아어나 아랍어로 번역 가능한 능력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1971년, 팔레비 왕조는 페르시아 제국 2500년기를 맞아 성대한 건국절 행사를 진행했다. 굉장히 규모가 큰 리인액트먼트도 하며 페르시아의 수천년 역사를 성대히 축하했는데, 당시 이라크에 망명 중이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악마의 축제'''라고 맹비난을 했다. 이에 대한 당시 대중들은 '''[[넌씨눈]]'''을 시전했다고 한다. 나중에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던 호메이니가 저 소리 듣고나서 바로 '''여러분들 다 오해임. 난 [[페르시아 제국]]을 축하해서 악마의 축제가 아니라 너무 낭비가 심해서 악마의 축제임'''이라고 발언을 수정했다.[* 실제로 팔레비 측에서 이 행사를 하는 데 세금 낭비라고 불려도 손색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심지어 저 발언은 나중에 공식적으로는 '''와전됐다.''' 혹은 '''무지한 대중들이 오해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적으로는 "그때 내가 무슨 깡으로 그런 개소리를 했지?"하고 후회했다. 이 정도로 이란인의 페르시아인으로서의 자부심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