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규완(1862) (문단 편집) == 생애 == 1862년 한성부 뚝섬 출생. 왕족 출신임에도 오래 전에 몰락해서 광주군 남종면에서 살다가 아버지 때는 [[뚝섬]]에서 나무꾼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그는 소년 시절 [[박영효]]를 찾아가 그의 식객으로 생활했다.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서재창]] 등과 함께 정변군의 지휘관이었고, [[검술]] 실력이 뛰어나서 [[민영익]] 등의 귀를 칼로 베었다 한다. 특히 [[이완용]], [[송병준]] 등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불알 간수 잘하라고 농담하면서 수근댔다. [[1907년]] [[순종(대한제국)|순종]]이 그를 조선 최후의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했는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대로 [[조선총독부]]의 강원도장관에 유임되어 초대 [[강원지사]]가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규완.jpg|width=100%]]}}} || || {{{#fff '''함경남도 장관 취임식 모습'''}}} ||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로 등재되어 있는데, 실제 일제 강점기 때 도지사 등의 고위직을 지낸 것은 맞으나, 조선인 참정권 및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경술국치 직후에 주장한 내용으로 [[3.1운동]] 이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과 문화 통치를 사용하는 총독들, 1940년 이후 총독부에서 민족 분열 정책 및 전시 활동 참여 장려의 일환으로 사용된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내용이며, 그의 활동으로 짐작해보면 [[연방국]]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민족은 다르지만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나라를 구성하는 체계를 생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똑같이 자치 운동을 했지만 [[박춘금]] 등과는 좀 다른 케이스인 셈이다. [[여성]]들의 인권 향상을 주장하였고 다른 친일파들이 흔히 보인 탐욕성과 달리 일상 생활에서 성실하였으며 악습 근절에도 앞장섰다. 신간회, 물산 장려 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창씨 개명, 병력 동원, 공출, 일제를 위한 군수물자 지원 활동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전쟁 관련해서 참여한 것은 조선인 참전 병사 위문품 후원회 및 원조처럼 순전히 조선인과 관련된 활동에만 참여하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 총독부에서 방공호 구축을 지시하기도 했지만, 무시했다.] 다만 조선인들이 악질적인 구습을 타파하지 못하였고 나라를 충분히 발전시키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한일합방|일제에 합병]]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독립 운동에 대해선 현실성이 낮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3.1 운동]] 당시 평안도의 최고 직위에 있었으나 '''독립 운동에 반대'''한다는 경고문을 붙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에게 3.1운동에 신경쓰지 말고 생업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45년 [[8.15 광복|해방]]이 되자, 스스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니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고, 자신은 나라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에는 미군정 관계자들은 물론 [[이승만]]의 특별 조문단 [[이기붕]], [[윤치영]] 등과 [[김구]]의 특별 조문단 이외에도 강원도지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어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장례식 당시에 독립운동의 큰 축이였던 김구와 이승만이 조문단을 보낸걸 보면 최소한 당시 명망이 바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해방 이후에 암살 시도와 투석, 수많은 비난이 이어졌던 [[윤치호]]와는 달리 임시 강원도지사를 맡기도 했던걸 보면 반민족 행위와 별개로 사람들 못살게 굴진 않은듯. 못 살게 굴긴 커녕 [[대인배|당시 강원도에서 학교 다녔던 가난한 고학생들의 등록금을 자비를 털어서 내줬던 사람]]이다. 확실히 사리사욕을 위해 친일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본인은 독립 운동한 거 없다고 하지만,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활동 자금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위키피디아에 상해 임시 정부에 자금을 송금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인이 되진 않고 있다.] 물론 그저 설일 뿐이라 확실하진 않다. 애초에 그런 일 있음 본인이 밝혔을 확률이 높지만, 실제 본인은 상술되어있듯 3.1 운동도 반대했고 독립 운동도 안했다고 명확히 밝혔다. (추론이지만 만일 그가 강직한 성격이였다면 활동자금을 좀 보낸 것 만으로 독립운동에 기여를 했으니 죄를 참작해달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승만은 이규완 사후인 1953년 그의 차남 이선길에게 신신 백화점 부지 및 주변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해주겠다 제안하였으나 이선길은 도가 지나친 호의라며 이를 거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