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귀 (문단 편집) == 기타 == * 성격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단점을 단점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가령 "공을 보면 마음의 병이 있는 것 같소"('그 성격 좀 고치시오'를 최대한 점잖게 돌려 표현한 거다.)라고 지적한 사람에게 "그 말이 맞다며 자신에게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의 병이 있으니 나같은 사람이 더 있다면 나라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현실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이이의 제자이며 유생이었던 인물이면서 "[[류성룡]]이 대간을 폐지시켜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자신 역시 류성룡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며 "말 많은 대간 따위 콱 폐지하는게 낫다"고까지 했다. * 만주족의 발흥을 경계해 병서인 [[이충정공 비어방략]]을 지었고, [[남한산성]] 정비 책임자인 이서를 지지해 [[수어청]]을 창설하게 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그만큼이라도 버텼던 것은 이귀의 선견지명 덕이라는 평을 얻었다. * 아들들도 청렴하여 훗날 장남 [[이시백]]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차남 [[이시방]]은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했다. 두 형제 모두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이시방은 대동법 시행의 실무자 중 1명이었다. 대동법은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는데 이는 토지를 바탕으로 세금을 걷기 때문에 [[탐관오리]]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는 이귀의 평이 나쁘게 쓰인 면이 많은 편이다. 그 예로 [[임진왜란]] 당시 장성현감을 지낼 때 [[김덕령]]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김덕령은 1592년 [[고경명]] 막하에서 의병으로 종군하다 낙향하고 1593년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켰다.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b_A1567_1_0001427|참조]]] 그 과정에서 김덕령을 아끼는 천진한 마음으로 '김덕령 최강 전설'을 지어내었는데 과장이 너무 심했다. 하지만 인터넷상의 인식과는 달리 선조는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 전공없이 말만 무성한 김덕령을 못 미더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이귀의 말을 듣고 대간들로부터 보호하고 지원해줬다. * 인조 재위기에 [[김류]]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는데 공신 책봉을 논할 때부터 서로 삿대질하고 싸웠다고 하니 상당히 오랫동안 갈등했다. 서로 비교해보자면 분야별로 대충 이렇다. [[서인]] 장악력에서는 이귀가 한 수 위였는데 [[이이(조선)|이이]]의 제자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이귀가 서인 내에서는 입지가 좋았고 그래서 김류는 소북과 [[남인]]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직책은 김류가 앞섰는데 김류는 일찍 정승에도 오르고 영의정도 해보았지만 이귀는 죽을 때까지 정승이 되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신임 역시도 김류가 앞섰는데 이귀의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인조가 멀리했고 이귀는 서인에 상당히 치우친 태도를 보였으며 마침 인조는 [[붕당]]을 혐오하는 임금이었다. 이러니 김류가 더 총애를 받아 빨리 출세하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밖에 없다. 김류는 말년에는 인조에게 미운털이 박혔는데 인조 10년의 추숭 반대에 이어 인조 말년의 [[민회빈 강씨|강빈]] 사사에 반대했기 때문. 그 직전에 [[효종(조선)|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데 찬성했는데도 말이다. 능력 부분은 알려진 바로는 김류가 한 수 위로 추정되는데 김류는 그나마 행정 관료로서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도 인조반정 이전에 김류가 많은 직책을 거쳤으며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대부분 유생 신분이거나 해서 공신임에도 바로 고위직을 받은게 아니라 종6품을 받고 고속 승진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서도 이귀, 김류, 최명길은 이조와 병조의 판서, 좌랑 등을 맡으며 인사권을 쥐었는데 3명이 그나마 벼슬을 해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제일 여러 직책을 거친건 김류인데 최명길도 이전까지 가장 위로 올라간 직위가 좌랑이었고 이귀는 아예 [[군수]]만 전전했기 때문.] 이귀는 이런저런 의견은 잘 냈는데 인조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실제 능력은 알 수 없으며 능력이 있어도 신뢰를 받고 중용되어야 가능한데 이귀는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창(무기)|창]]과 [[방패]]의 관계이기도 한데 이귀는 큰 의견을 잘 내놓는 창이라면 김류는 신중하지만 보수적이고 행정 업무를 잘 하는 방패라 볼 수 있을 듯. 그렇기에 상호 보완적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자식들 문제는 이귀가 나았는데 이귀의 두 아들은 둘 다 잘나갔고 특히 이시백의 경우 [[김자점]]과 더불어 인조가 죽으면서 [[효종(조선)|효종]]에게 잘 예우하라고 한 [[신하]]였다.[* 김자점은 미운털이 박힌데다가 잘못을 저질러 결국 역적이 되었지만 이시백은 끝까지 잘나갔다.] 반대로 김류는 아들 [[김경징]]이 [[병자호란]] 때 거하게 터뜨렸다가 [[사약]]먹고 손자 [[김진표(조선)|김진표]]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며[*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김진표는 그다지 출세하지 못해 공조참의까지만 했다. 이시백만 해도 아버지가 해보지 못한 영의정이 되었는데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