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궁지쟁 (문단 편집) === 241년부터 245년까지 === 문제의 원인은 애초에 손권에서부터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당초 손권은 [[손등]]의 죽음 이후 손화를 태자로 삼으면서 손패를 비롯한 다른 아들들을 애초에 왕으로 세울 생각이 없었다. 사실 손등이 태자자리에 있었을때도 다른 아들을 왕으로 세운바가 없는 손권이었으니 이런 기조는 당연했다. 그는 손등을 태자로 삼았을 때도 지속적으로 둘째아들 [[손려]]를 왕으로 올려 왕실의 변방으로 삼으로는 청을 거절했다. 이후 손등이 죽자 조정 신료들 모두는 손화를 태자로 삼을때 다른 손권의 아들들을 왕에 봉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청했고 손권은 결국 모두를 왕에 올리진 않고 과거 손등을 보좌했던 손려의 사례처럼 손패를 왕에 올리는데 동의하게 된다. >적오 5년(242년) 봄 정월, 아들 손화(孫和)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화흥현(禾興)을 가흥현(嘉興)으로 고쳤다. 모든 관리들이 황후를 세우고 네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 >"현재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수고로우며 고달프다. 게다가 공로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는 오히려 구휼되지 못했다. 그런데 토지를 함부로 분할하여 자신의 자제를 풍요롭게 하고, 작위를 높여 자신의 비첩을 총애하려고 하니,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건의는 방치하라. > >(중략) > >가을 7월, 장군 섭우(聶友), 교위(校尉) 육개(陸凱)를 보내 병사 3만 명을 인솔하게 하여 주애(朱崖)와 담이(儋耳)를 토벌하도록 했다. 이 해, 역병이 크게 유행하였고, 담당 관리들은 또 황후를 세우고 자식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 >8월, 아들 손패(孫霸)를 세워 노왕(魯王)으로 세웠다. 흔히 손권이 손패를 총애해서 노왕 자리에 올리고 우쭈쭈한게 문제라는데, 원래 손권은 손화를 태자로만 삼고 손패를 노왕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해에 역병이 들자 왕을 올려 황실을 튼튼히 하라는 조정신료들이 다시 청했고 손권은 결국 다른 아들들은 일단 놔두고 손화의 바로 아랫동생인 손패를 노왕으로 삼게 한다. >손화가 태자(太子)로 임명되었을 때 손패는 노왕(魯王)이었는데, 총애와 특별한 대우에 있어서는 손화와 다름이 없었다. >---- >손패전 >남궁(南)과 노왕(魯)의 궁, 두 궁궐이 처음 세워졌을 때, 시의는 본래의 직책 위에서 또 노왕의 부상(傅)을 겸임하였다. 시의는 두 궁의 지위가 근사함을 꺼려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왕은 천부적인 미덕을 갖추고 있고 문무의 자질을 겸하고 있으며, 현재의 상황에 근거하여 적절한 것은 마땅히 사방을 지키도록 하여 국가의 방어를 돕도록 해야만 합니다. 노왕에게 아름다운 덕행을 선양하고 권위있는 명성을 널리 빛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국가의 훌륭한 법도이며, 사해 안의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신의 언사가 조잡하고 거칠어 생각을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뿐입니다. 저는 두 궁은 지위에 있어 높음과 낮음의 차이가 있어 상하의 질서를 바르게 하여 교화의 근본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이러한 내용의 표를 서너 번 올렸다. 그는 노왕의 부상으로 있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항상 간언을 했다. 그리고 군주를 섬김에 있어 근면하고 사람들과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귀었다. >---- >시의전 >애초에 손권이 손화를 태자로 삼고, 손패를 노왕으로 삼고, 그들에게 같은 궁궐에 살면서, 그들의 각각의 예법에는 따로 구별을 두지 않았다. 그러자 많은 대신들이 태자와 국왕은 마땅히 위아래의 서열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예법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따로 궁궐을 나눠 살게 했는데, 이때부터 분열이 시작되었다. 시어(侍御)와 빈객(賔客)들이 두패로 갈라지고, 나중에는 대신들까지 두패로 갈려졌다. > >승상(丞相) 육손(陸遜), 대장군(大將軍) 제갈각(諸葛恪), 태상(太常) 고담(顧譚), 표기장군(驃騎將軍) 주거(朱據), 화계태수(會稽太守) 등윤(滕胤), 대도독(大都督) 시적(施績), 상서(尚書) 정밀(丁密) 등이 예법을 내세우며, 태자를 따랐고, 표기장군(驃騎將軍) 보즐(步隲), 진남장군(鎮南將軍) 여대(呂岱), 대사마(大司馬) 전종(全琮), 좌장군(左將軍) 여거(呂據), 중서령(中書令) 손홍(孫弘) 등이 노왕(魯王) 편을 들었고, 이곳 저곳의 장군 관료 대신들이 둘로 나누어졌다. > >손권은 이를 크게 우려하여 시중 손준(孫峻)에게 명하여 > >"아들들이 이렇게 서로 싸우고, 신하들도 나누어지니, 장차 원소의 원씨(袁氏)의 집안 꼴이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겠소. 자제들이 화목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나뉘어져서 장차 원씨와 같이 실패함이 있게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만약 한 사람을 세워놓게 된다면 어찌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소?" >---- >손패전 주석 은기통어 어쨌든 손권은 손패를 노왕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는데 신하들이 아들들을 번왕으로 삼으라 했기에 결국 타협해서 손패만을 노왕으로 삼았고, 손화와 손패가 손권의 아들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가 되자 총애와 특별한 대우에 있어서는 손화와 다름이 손패가 다를것이 없었다. 이에 지속적으로 신하들이 두 사람의 예법을 다르게 해야한다고 간언해서 해서 궁을 따로 짓게한걸 손권이 그대로 따랐다. 즉 손권은 신하들이 예법 다르게 해야한다고 해서 그 말대로 따로 나가서 살게하면서 두 사람의 구분을 지었던 것이다. 근데 문제는 이런 전장제도를 마련한 [[감택]]과 [[고옹]]이 죽고 육손이 승상에 오르면서부터 발생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처음엔 두 왕자 사이의 빈객들이 편을 나누던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조정신료까지 두패로 나뉘어서 태자파, 노왕파 만들어서 당파를 짓고서는 싸움질을 하게 되었다. 손권이 이궁의 대우를 다르게 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나온것이 사실이지만 손권이 이 건의를 씹은 것도 아니고 두 궁을 나누어 예법을 다르게 해달라고 해준거 자체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진짜 손권은 왠만해선 신하들 해달라는대로 다 해준셈이다. 근데 정작 그렇게 해주니까 신료들이 손화랑 손패가지고 당파를 짓고 황자들한테 바람 불어넣으면서 싸움질을 해대기 시작한것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오래지 않아 손화와 손패가 화목하지 않다는 소리가 손권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손권은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켜 끊도록 하고 그 시간에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다. >---- >손패전 여기서 그럼 손권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손권이 처음부터 화낸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그냥 양쪽 궁궐에서 싸움질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라는 식으로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양측의 갈등에 있어서 누구도 손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래서 독군사자 양도가 보다 못해 손권에게 상소를 올렸다. 양도는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식으로 손패파로 오해받기도 하나 이궁지쟁 당시에는 이 표를 올린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취한바 없으므로 태자의 남당과 노왕의 노당의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이 듣기로는, 옛날에 천하를 소유한 사람은 모두 우선 적자(適)와 서자(庶)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자제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조종(祖宗)을 존중하며 국가의 방위벽이 되었다고 합니다. > >두 궁궐이 각기 태자와 노왕(吳)으로 책봉되었을 때 사해 안에서는 마땅한 처사라고 칭찬했으며, 이것은 위대한 오나라가 흥성하여 융성해질 기초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두 궁궐이 동시에 빈객을 거절한다는 말을 듣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은 놀랐으며 크고 작은 관원들은 실망했습니다. > >저는 사사로이 아랫사람들의 의론 중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수집하였는데, 모두 두 궁궐에 있는 자는 지혜가 통달하고 영재가 무성하며, 신분을 세우고 명호를 확정시킨 이래로 오늘까지 3년이 되었는데, 덕행은 안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명성은 밖에서 빛나 서쪽과 북쪽 두 모퉁이에서도 오래 전부터 그들의 명망을 듣고 복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덕정(德)에 귀순하기를 갈망하는 것에 순응하여, 두 궁궐에서 사방 먼 곳의 빈객들을 초청하도록 명해 다른 나라로 하여금 그들의 명성을 듣게 한 후 그들의 노복이 되기를 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현재는 이 점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조서를 내려 그들의 방위를 감소시키고 빈객을 거절하도록 하여 사방의 예의와 경의로 하여금 다시는 통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실제로 폐하께서는 고대의 도의를 숭상하여 두 궁궐로 하여금 학문에만 뜻을 전념하여 다시는 미소한 일을 생각하고 관찰하거나 듣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역사 경험을 익혀 광범위한 사물을 숙지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신들이 머리를 길게 하고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어떤 사람은 두 궁궐이 전장 제도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이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설령,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보충 조사하고 세밀하게 고려하여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유언비어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이 두려운 것은, 의심이 쌓여 비방이 되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이 사실이 사방으로 전해질 것이고, 서쪽과 북쪽의 두 모퉁이는 우리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이동(異)의 말은 쉽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 >일단 전해지는 날이면, 여론은 반드시 일어나 두 궁궐은 순리를 따르지 않은 죄가 있으며, 폐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이 점을 다른 나라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면, 또한 국내의 백성들에게도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국내의 백성들이 의심하고, 다른 나라에서 훼방을 일으킨다면, 웅대한 사업을 발전시키고 사직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일찍 우수한 조서를 발표하여 두 궁궐로 하여금 처음과 같이 훌륭한 인물들과 예의로써 왕래하고 임명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천지가 맑고 편안해질 것이며 만국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양도의 판단에 따르면 '두 궁궐이 전장제도를 준수하지 않는다(이궁이 병립한다)라는 거 자체가 아마도 이때 쯤 손노반의 공격으로 태자파가 불안감을 품어서 적서의 구분을 더 분명히 해야한다. 지금까지는 궁의 대우가 동등했다는 주장이 비방, 유언비어식으로 나돌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양도는 '유언비어인것을 손권 본인도 알고 있으니, 갑자기 빈객을 끊고 이러면 괜히 유언비어만 퍼지니까 세밀하게 고려해서 원래대로 조치를 돌려라'라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의심이 쌓여 비방이 되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이 사실이 사방으로 전해질 것이고, 서쪽과 북쪽의 두 모퉁이는 우리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이동(異)의 말은 쉽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적서구분을 손권인 안한게 아니고 설령했다고 해도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면 될 일일 뿐이라는게 양도의 인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비방과 유언비어(이궁이 동등 대우를 받아서 태자자리가 위태롭다)라고 소문을 퍼뜨린 자들이 있다고 양도는 판단한 것이다. 바로 손화파인 남당파들이 이런 소문을 퍼뜨리면서 손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무렵에 손화가 손권의 총애를 잃을 짓을 한다. 손화가 무고하다고만 보통 알려져 있는데 손화가 총애를 잃은 연유는 손화의 행실에 있었다. >이 이후 왕부인(王夫人)과 전공주(全公主) 사이에 틈이 생겼다. 손권은 일찍이 질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손화가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손화의 비(妃)의 숙부인 장휴(張休)가 종묘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손화를 초청하여 머물도록 했다. 전공주는 사람을 시켜 은밀히 감시하도록 하고는, 태자가 종묘 안에 있지 않고 오로지 비의 집으로만 가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또 왕부인은 황상이 질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다고 말했다. 손권은 이 일로 인해 노여워했다. 왕부인은 근심하다 죽었고, 손화의 총애는 점점 줄어들어 폐출될 것을 두려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육손(陸遜)ㆍ오찬(吾粲)ㆍ고담(顧譚) 등은 적자와 서자의 이치에 관해 여러 차례 진술하여 태자의 지위는 정리(理)에 따라야지 탈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기(全寄)와 양축(楊竺) 등은 노왕(魯王) 손패(霸)의 무리가 되었고, 이들의 모함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오찬은 결국에는 하옥되어 주살당했고, 고담은 교주(交州)로 쫓겨났다. 손화의 어머니인 왕부인([[대의황후 왕씨]])과 전공주, 그러니까 [[손노반]]은 사이가 나빴기에 손노반은 어디 손화를 공격할 거리가 없나 하고 기회를 노리던 상황이었다. 마침 손권은 몸이 아파서 종묘의 제사를 손화에게 맡겨서 종묘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문제는 황실제사를 지낼거면 종묘에 있어야 할 태자가 종묘에는 안 있고 손화의 본처 [[장비(손오)|장비]](張妃)의 숙부인 장휴의 집이 근처에 있어 손화가 처갓집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당연히 손권은 종묘에서 지내면서 제사를 지내야 할 손화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저러는것에 격노하였다. '''무슨 황실제사가 장난도 아니고 고대에 제사의 중요성은 당연히 현대보다 중할 수 밖에 없다.''' 왕부인의 건은 손노반의 모함이라도, 중간에서 황명을 어기고 종묘에 머물면서 제사 지내야 할 손화가 본인이 편하자고 처잣집에 머문건 사실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태자랑 노왕이 쌈박질에 조정신료라는 자들과 결탁하여 분쟁을 일으킨 사안에 대해서 손권이 진절머리를 치던 중이었는데 손화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손권은 손화를 총애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 문제는 손화가 자초한 것이었으며, 당황한 남당파들은 이런 돌발사태에 태자를 폐하면 안된다고 말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보다 앞서, 태자와 노왕의 두 궁궐이 병립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대부분 자제를 보대 임무를 받도록 했다. 전종이 이 일을 육손에게 보고하자, 육손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자제들에게 만일 재능이 있다면 임용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을 것 이므로, 마땅히 사적인 청탁으로 관리로 임명되어 영리를 구하짐 말아야만 된다. 만일 이 일을 훌륭하게 실행하지 못한다면 결국 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궁궐의 세력이 대적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이쪽을 지지하는 파와 다른쪽을 지지하는 파가 대립관계가 있게 된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옛사람들이 매우 기피했던 것이다." > >전종의 아들 전기(全寄)는 과연 노왕에게 아부하고 경솔하게 교제관계를 맺었다. 육손이 전종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당신은 김일제(金日磾)를 본받지 않고 아기(阿寄 ; 전기)를 비호 하였으니 당신의 가정에 재앙이 이를 것입니다. > >전종은 육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다시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태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론이 있게 되자,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태자는 정통이므로 마땅히 반석같은 견고함이 있어야 하고, 노왕은 번신(藩臣; 왕실의 내부를 지키는 신하)이므로 총애와 대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피차 각각의 위치에 있어야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안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며 저의 의견을 진술합니다. >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도성으로 가서 적자와 서자의 구분에 대해 직접 논의하여 득실을 바로잡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손권은 그의 의견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다. >---- >육손전 이때 전종은 자신의 아들 전기를 파견하여 손패를 섬기게 하고 육손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데, 육손은 전종에게 그건 옳지 않은 행위라고 경고하지만 전종은 듣지 않는다. 여기에 손패파로 들어간 전기가 둘 사이를 이간질하니 육손과 전종의 사이는 더 틀어지고, 육손은 다시 한 번 김일제[* [[곽거병]]의 흉노 토벌 때 잡혀온 흉노 번왕의 왕자로([[선견지명]] 참조),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식들과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자 아예 자기 아들을 죽여서 우환이 될 소지를 막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김일제를 언급하는 것은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는 소리를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의 사건을 보라며 경고하지만 전종은 아예 답변조차 하지 않아 둘 사이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둘 사이 서신의 자세한 내용은 [[육손#s-2.8]] 참고.] 또한 손패는 손화파지만 같은 손화파인 제갈각과 사이가 나쁜 주적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그의 관서까지 찾아가나, 주적은 땅으로 내려가면서까지 합당을 사양하니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후에 주적은 강릉전투에서 제갈각의 동생 [[제갈융]]과의 사건으로 인해 제갈각과의 사이는 더 악화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손패파로 노선을 변경한 것 같지는 않다.] 육손은 이 상황에서 태자파 영수로 전종에게 '김일제처럼 왜 니 아들 안죽이냐'라고 협박했고 전종을 김일제에 비하면서 손권을 은근히 [[한무제]]와 비교하는 등 슬슬 선을 넘고 있었다. 아마 이 김일제를 논하면서 전종과 손권을 공격했던 것을 전종이 손권에게 알렸으면 불벼락이 진작에 떨어졌을 것인데, 그래도 윗사람(육손이 손책 사위, 전종이 손권 사위)이라고 전종이 참고 넘어가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오지가 손화 아들인 [[손호]]때 지어진 오서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어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손화파는 잘못이 없고 손패파만 손화를 모함하면서 잘못이 있는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양도가 유언비어를 언급하며 은근히 손화파를 저격하고 육손이 편지로 전종을 인신공격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손화파도 만만치 않았다. 육손은 승상의 지위에 오른 이후 태자의 위치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적서의 구분이 이미 명백한 상황에서 총애와 대우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계속 진술하였다. 그러나 애초에 이럴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육손이 먼저 손권의 원래 의도대로 손패를 노왕에 올리라고 하질 말든가, 아니면 신하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손패 말고도 다른 아들들도 모두 왕작에 봉해야 한다고 먼저 주청했어야 정상이다. 손권이 신하들 하라는대로 했는데도 이제 와서 계속 적서가 불분명하다면서 손권이 받아들이지 않을 짓을 한 것을 보면 육손도 이 문제에서 그렇게 책임이 깨끗하진 않다. 그리고 애초에 태자란 인물이 가뜩이나 조정에서의 당쟁으로 손권의 분노게이지가 점점 오르는 마당에 빌미를 제공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육손과 고담은 각각 상소를 올려 손권의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지만 아들들간의 싸움과 신하들이 파벌을 지어 싸우는 행태에 질린 손권에게 육손 같은 세력 있는 신하가 뒷배인 손화파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이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손패는 화가 나서 고담과의 사이가 더더욱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종과 그 아들들 역시 고담을 미워하게 되는데, 원래 고담은 전종의 아들 전기의 성격이 간사한 것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하고 있었다. 거기다 과거 위나라와의 전쟁 때 장휴와 고승의 공이 전서와 전단의 공보다 크다고 하여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으로 승진하고 전서와 전단은 그보다 아래인 편장군, 비장군의 직위로 오르게 된 적이 있는데,[* [[전서(삼국지)|전서]] 문서에서도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위나라 왕릉의 추격을 장휴와 고승이 막아내자 그 분위기를 타고 전서와 전단이 공격해 오히려 퇴각시키고 승리했다. 이에 적을 물리친 건 전서, 전단의 공이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장휴, 고승의 공이 더 크다고 하여 더 높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이게 타당한 건지 아니면 권위있는 호족 집안인 장휴, 고승에게 편파적인 거였는지는 각자 판단할 일.] 이 전서는 전종의 아들이자 전기의 형이고 전단은 전종의 조카였으므로 전종과 전기는 그들을 더욱 미워하고 있었다. 손화파의 공세에 불만을 품은 손패파가 먼저 목표로 삼은 것은 241년 수춘 전투에서 적의 기세를 꺾어 피해를 막은 장휴와 고승이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전기는 과거에 형 전서의 공이 이들 때문에 과소평가되었다고 미워하던 터라, 양축, 오안, 손기, 전기를 중심으로 한 손패파가 손권에게 장휴와 고승이 진순과 내통해서 거짓으로 공을 늘렸다고 참소한다. 손권은 그 둘에게 벌을 내리고 [[연좌제]]로 그들의 친족들에게도 벌을 내리는데, 이때 고승의 친족인 고담 또한 연좌제로 벌을 받게 된다. 손권은 그래도 자신이 총애하던 고담인지라 그에게 사죄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나 고담은 >'''폐하, 참언[* 거짓으로 남을 헐뜯는 말.]이 흥하고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패기]] 넘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에 사무를 맡은 관리는 "저런 불경죄를 저지르다니! 저건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라고 외치나, 손권은 여기서 아량을 베풀어 조부 [[고옹]]을 생각해 봐준다며 장휴, 고승, 고담을 교주[* 지금의 [[베트남]].]로 유배보낸다. 이렇게 유배를 간 장휴와 평소 사이가 나빴던 손홍이 장휴를 참소, 장휴는 41세에 죽고 고담 또한 유배간 지 2년 만에 죽었으며 고승 또한 37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 태자 손화가 그의 명성을 듣고 남다른 예절로써 대우했다. 마침 전기(全寄)와 양축(楊竺) 등이 노왕 손패에게 붙어 아부하고, 손화와 분쟁이 생겨 은밀히 서로 모함을 하게 되자, 육윤은 여기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가혹한 형구를 모두 사용했지만, 그는 끝까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태자는 폐출될 것을 두려워했고, 노왕은 불손한 태도가 더욱 심했다. 손권은 당시 양축을 보고 측근에 있는 자들을 물린 후 손패의 재능에 관하여 논의했다. 양축은, 손패는 문무 양면에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으므로, 마땅히 정식 후계자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진술했다. 그래서 손권은 손패를 태자로 세우기로 약조했다. > >그런데 측근에 있는 자가 평상 밑에 엎드려 있다가 이 말을 듣고 태자에게 알렸다. 마침 육윤은 무창에 이르러 태자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태자는 미복으로 육윤의 수레 위로 올라가 함께 은밀히 이를 논의하고, 육손으로 하여금 표를 올려 간언하도록 했다. 그후 육손이 표를 올려 강력하게 진언하자 손권은 양축이 이 사실을 누설하였을 것으로 의심했다. 문책을 받게 된 양축은 이를 부인했다. > >손권은 양축을 풀어주고, 이 일이 어떻게 누설된 것인지 연유를 찾도록 했다. 양축은 육윤만이 서쪽으로 갔으니, 반드시 그가 말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또 사자를 보내어 육손에게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된것이냐고 묻자 육손이 육윤이 알려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육윤을 불러 고문하게 되었다. 육윤은 태자에게 죄가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 >"양축이 신에게 말했습니다." > >라고 했다. 그래서 양축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양축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이런 거짓을 자신이 말했다고 시인하게 되었다. 손권은 애초에 양축을 의심했었는데 양축이 이를 시인하자 예상했던 바 그대로였다며 양축을 처형했다. >---- >육윤전 >태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론이 있게 되자,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태자는 정통이므로 마땅히 반석같은 견고함이 있어야 하고, 노왕은 번신(藩臣; 왕실의 내부를 지키는 신하)이므로 총애와 대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피차 각각의 위치에 있어야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안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며 저의 의견을 진술합니다. >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도성으로 가서 적자와 서자의 구분에 대해 직접 논의하여 득실을 바로잡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손권은 그의 의견을 듣고 따르지 않았다. 육손의 생질들인 고담, 고승, 요신이 모두 태자에게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무고하게 쫓겨나게 되었다. 태자태부(太子太傅) 오찬(吾粲)은 육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왕래했다는 사실 때문에 옥에 갇혀 사망했다. 손권은 궁궐으로부터 사자를 자주 파견하여 육손을 질책했다. 육손은 분노하고 통탄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고, 집에는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 >육손전 이런 일이 벌어지자 손화파인 오찬은 시의의 상소문처럼 손패를 내보내 하구를 지키도록 하고 손패파의 행동대장인 양축을 내보내 경사에 있지 못하도록 건의했고 무창에 있어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는 육손에게 계속해서 소식을 전해준다. 육손은 오찬을 통해 정보를 얻은 후 손권에게 끊임없이 표를 보내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만, 손패파는 이에 반응해 양축과 함께 오찬을 힐난하고 손권은 '''오찬을 투옥시키고 결국 오찬은 옥사한다.''' 이어서 양축은 20가지의 이유를 들어 육손을 고발하고, 손권은 무창에 있던 육손을 계속 힐난하는 사신을 보내게 된다. 결국 육손은 이 문제에서 끝까지 손을 떼지 않고 손권과 대립하였다. 손권이 육손의 청을 거절하고 육손의 생질들인 고담, 고승, 요신을 유배한 후 육손과 손을 잡고 손화파에 섰던 오찬을 처형한 뒤에도 육손은 태자인 손화를 바로 자신의 임지인 무창으로 불러 가까이 두면서 서로 계책을 논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손권은 손패파인 [[양축]]을 몰래 불러 손패에게 태자를 물러주겠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애당초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손권이 양축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양축을 떠보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각에게도 손패파에 속한 제갈작에 대해서 경고를 한 바가 있는 손권인 만큼 손패를 총애한다고 한들 손패파의 행각을 무조건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손권의 근신들과 [[육윤]]이 무창에 있던 육손과 손화에게 손권의 의견을 몰래 발설하는 사태가 터진다. '''즉 한나라의 승상과 태자가 군주를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어 몰래 감시하다가 들통난 셈이다.''' 어이없게도 육손은 손권에게 대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느냐고 추궁받자 자신에게 정보를 알려준 육윤의 존재를 알려서 본인의 책임을 회피해버렸고 결국 이 사건으로 육윤과 양축은 모두 숙청되었으며 처형된 양축의 시신은 개울물에 버려지고, 육윤은 내쫒기는 결말이 나고야 만다. 당연히 양축의 일족도 다 피해를 입었지만, 양패의 형 양목의 경우 과거 육손이 양축을 조심하고 아예 가문을 따로 차리라고 경고했었던 것을 따라 그동안 양축을 여러 번 말려서 선을 그었던 점이 참작되어 남쪽 주로 유배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렇게 되어 손권과 육손은 한쪽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상소를 보내고 한쪽은 궁궐의 사자를 보내 그 행동을 비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육손은 이를 이기지 못하고 245년에 결국 분노와 통탄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이런 육손의 분사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상주인 육항에게까지 환관을 보내 양축이 고발한 20가지에 대해 설명하게 하지만, 다행히도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능력을 물려받은 육항이었기에 이에 대해 막힘없이 조리있게 반박, 손권도 감탄하며 의심은 점점 풀리게 된다.[* 여일 사건 때 여일의 정치 공세에 육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나 이 사건 당시 양축의 고발에 대해 육손 본인은 통한하여 분사했을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걸 아들 육항이 막힘없이 처리했다는 점을 들어 정략적인 능력에서는 육항이 아버지 육손보다 낫다는 평가도 꽤나 된다.] 결국 육손전만 보면 육손이 손권에게 핍박을 홀로 받아 죽은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은 육손은 육손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불손함의 선을 넘어서 손권을 감시하며 손권에게 자꾸 뭐라고 하는 상황이고, 손권 역시 항상 신하들과 긴장관계에 있던 상황에서 본인의 측근이었다고 할 수 있는 육손까지 손권의 명령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태자를 멋대로 자기 임지에 불러서 계획을 짜고 자신을 감시하니 화를 참지 못해서 상호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상호간 스트레스가 심화되던 도중 육손이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먼저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 일을 가지고 몇몇 삼국지 팬들은 손권이 음모를 통해 육손을 강제적으로 폐기했다는 얘기까지 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평생 사이가 괜찮은 신뢰 관계였던 두 사람이 말년에 감정 싸움 끝에 안 좋게 결말이 난 상황이지 손권이 육손을 고의적으로 숙청하거나 그런것이 아니다. 육손은 끝까지 오나라의 승상으로 죽었고 손권이 육손을 질책하긴 했을지언정 그에게 주어진 권한을 회수하거나 벌을 내린 적도 없고, 육항에게 육손과 갈등하면서 있었던 일을 사과하기도 하는 등 손권 역시 본인의 감정적 실책임은 인정한 일이다. 육손이 이렇게 세상을 떠난 후, 이궁간의 갈등에 대한 논의는 손화파의 영수인 육손이 손권과의 갈등 끝에 사라지는 것으로 5년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손권은 이미 손화와 손패에 대해 감정적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 아직 숙청되지 않았던 손패의 측근들이 끊임없이 손화를 공격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 파벌간의 갈등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는 결국 5년후에 손권이 손화, 손패 두 사람 모두를 처벌하게 되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245년 7월에는 이런 혼란을 틈타 [[마무]]라는 자가 손권과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위에 항복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마무와 그의 무리가 모두 처형된다. 한편 이때 [[제갈각]]은 손화파이고 그의 아들 [[제갈작]]은 손패파였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손패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손권은 제갈각에게 아들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하고, 이에 제갈각은 손권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아들에게 [[독살|독을 먹여서 죽인다]]'''. 이 행동으로 제갈각은 다른 손화파와 다르게 손권의 호감을 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