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궁지쟁 (문단 편집) === 손권의 아들들과 관련 === [[손권]]의 아들들 중 손등, 손려[* 손권의 차남이나 손등보다 먼저 죽었다.], 손화는 준수한 군주가 될만한 자질이 있었다. 심지어 어린 막내 손량마저도 똑똑함을 칭송하는 미담들이 사서 곳곳에 기록될 정도이니 너무 어렸을 뿐 정상적으로 즉위했다면 충분히 좋은 군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손량 이후 즉위한 손권의 육남 손휴도 요절해서 그렇지 괜찮은 자질을 보였기에 손권은 우수한 아들들을 많이 남겼다. [[조위]]와 [[촉한]]의 창업군주인 [[조조]]와 [[유비]]의 경우, 조조는 조비나 조식이나 개인적 행실에 문제가 있었고 유비는 아들들의 제대로 된 자질을 확인할 틈도 없이 죽었다는 점에서, 손권은 자식들의 재능 면에선 정말 축복받은 케이스였다. 그러나 오나라는 유독 요절한 인물들이 많았고, 하필이면 손권의 장남과 차남도 그러했다. 그러니 저렇게 많이 죽어나갔음에도 손휴 같이 막장이 된 오나라를 조금이라도 수습해보려 한 군주가 나온 것이다.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는 지능이나 학식, 문학적 재능 등 문(文)의 능력은 뛰어났으나 무(武)의 능력은 어중간했다. 그래도 종합적인 리더로서의 능력은 그럭저럭 나쁜 수준은 아니었으나, [[조비/인간성|인격에 결함이 있어서]] 군주로서는 좋은 인물이었다 할 수 없었다.[* 다만 나라를 완전히 망칠 수준의 암군은 아니었어서 특출나게 뛰어난 업적도 없지만 아버지가 물려준 기반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준은 되었다. 인격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거나 주색에 빠져 정사를 안 보는 수준의 막장은 아니었다. 다만 그놈의 인격적 결함 때문에 결국 자기 아내에게 자결을 강요해 죽여 자신의 아들이 타락하여 위나라 멸망에 일조하게 된다.] 또 다른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조식(삼국지)|조식]]은 문의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났으나 무의 능력은 검증된 바가 없었고[* 다만 조조가 그를 사령관으로 세워 한창 기세등등하던 양번 공략 당시의 관우를 막으려 한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재능은 있었던 모양이다. 조식은 조비의 모략으로 이 때 술에 취해 명을 받들지 못하고, 결국 후계자 구도에서 탈락한다.] 성격이 방종하고 방탕했으며, [[조창]]은 조식과 완전히 반대로 성격이 듬직한 맛이 있어 조조가 좋아했고 무의 능력은 상당했으나 문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군주로 부적합했다. 장자인 조앙은 197년의 장수 토벌전 때 조조의 어리석은 짓으로 완성에서 전사했고, 어리지만 총명해서 조조의 총애를 받던 조충은 13살에 죽었다. 그보다 더 아래로 조간이 있었지만 조간은 조조가 '''60세'''에 얻은 아들로 조조 사망 당시 고작 5살이었다.~~오나라로 치면 손량 포지션~~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삼국지)|유선]]은 성품이 어질고 무난했으나 난세의 군주로 살아남기에는 능력이 부족했고, [[유봉]]은 양자라는 약점이 있었던데다 조창처럼 오히려 군재로서 싹수를 보였다. 다만 그마저도 번성 공방전 당시 상용을 지키면서도 [[관우]]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며 애매한 재능으로 역사에 남아버렸지만. 유영과 유리는 207년 출생인 유선과 나이 차가 상당했다고 하니, 유비가 사망한 223년에는 어린아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유비는 오랜 세월 동안 유랑하느라 자식들을 많이 잃었으며, 유선 이외에 적당한 후사도 없었기에 이쪽은 선택지조차 많지 않았다. 결국 손권의 불행은 가장 뛰어났던 장남과 그 뒤를 이를만한 차남이 죽고도 아들들이 모두 비교적 자질이 뛰어난 편에 어느 하나 앞선 저 둘을 넘지는 못했다는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손권은 손화-손패 구도를 세우고 손등-손려가 화목하게 지내며 후계구도를 안정시킨 사례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불행히도 손화와 손패는 손등과 손려가 될 순 없었고 서로 갈등하며 파국을 맞이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이상적이었던 장남과 차남을 보면서 삼남과 사남도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문제가 커지기 전까지 그 이상의 조치를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후계구도에 신하들까지 가세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 하겠다. 손권의 이런 어찌보면 안이한 생각이 화를 불렀다는 점은 확실히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하다.[* 어떤 말로 변명을 해도 '''태자와 일개 황자'''의 지위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다. 나중에야 바로잡았다 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건 진작에 구분을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호되게 당한 손권이 손량을 세우면서 능력있는 신하들이자 자신의 최측근 세력들이며 외부 세력들이나 친족 세력인 제갈각, 손준, 등윤, 여거를 보정으로 세워 이런 후계과정의 혼란상과 호족들의 개입을 막아보려 한 것이 손량으로의 후계자 교체의 진상이다. 하지만 손권이 내세운 저들이 죄다 [[제갈각|자멸하거나]], [[손준|요절하거나]], 뜬금없이 나타난 [[손침|난신]]에게 각각 숙청당하거나(등윤, 여거) 하는 일로 이 인선은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손권이라고 이런 결과를 원하진 않았을테고 너무 결과가 안 좋긴 했지만 이것도 그의 실책이라면 실책이라 할 수 있겠다. 손량 역시도 손권 때문에 인생 망쳤다. 물론 손권이라고 세워둔 제갈각이 그렇게까지 실패하고 망가질 줄은 예상 못했겠지만 제갈각의 몰락, 손준의 요절 이후 손량은 손침의 전횡으로 재위기간 내내 허수아비 황제였고 결국 손침에게 폐위당한다. 이후에 손침이 제거되지만 본인은 이후 자살인지 짐살인지 모를 이유로 고작 18세에 사망한다. 손량이 황제가 될 때 당시에 10살도 안 되는 어린아이였음을 감안하면 손권의 실책으로 손량은 앉을만한 자리가 아닌데도 앉아서 딱히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성인도 안 되는 나이에 죽은 것이다. 중국 역사적으로 이렇게 어린 늦둥이를 황제로 즉위시켜서 좋은 꼴을 본 사례가 거의 없는데,[* 사실 중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어린 늦둥이를 지도자로 세우는 것 자체가 군주의 판단미스이거나 권력을 노리는 간신 혹은 권신의 의도이므로 세계적으로 좋은 사례가 나오기 힘들다. 그나마 [[무제(북주)|북주 무제]]같이 충분한 역량과 때가 올 때까지 그것을 감출 수 있을 정도의 참을성이 있다면 가능하긴 하지만 이런 사례는 손에 꼽을만큼 드물다.] 손권은 후사 결정에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이다. [[배송지]]의 경우 '''"그래도 모든 책임이 손권의 잘못은 아니다"'''라고 했다.[* [[배송지]]가 섬긴 [[송(육조)|유송]]의 태조 [[유의륭]]은 형 [[유의부]]가 황음무도하여 신하들에게 참살된 다음 즉위했고, 유의부의 아들 유의진도 황음하다는 평가를 받아 함께 살해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시대적 상황의 영향으로 배송지가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정통성보다는 유능함을 강조하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사실 먼저 죽은 황태자 손등이 후계자로 [[손화]]를 지목했다고 하나 이후에 후계자를 다시 [[손패]]로 바꾸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대우를 동등하게 했다는 얘기도 어떻게 보면 손권이 무슨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분란을 일으킬 목적도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신하들이 과하게 후계구도와 파벌 싸움에 간섭하면서 명분삼아서 상호간의 공격전에 쓴 감도 있는 편이다. 오나라의 신하들 역시 손권이 뒤늦게나마 두 궁을 따로 나가게 하여 차이를 두겠다고 제스쳐를 취할때 파벌 싸움을 멈출 필요가 있었는데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게 손권이 호족 때려잡으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하기엔 감택, 고옹이 두 궁의 법식을 제창한 초기에는 적서 구분에 대한 이의가 없었고 감택, 고옹이 죽은 이후 두 왕자들의 시종들끼라 싸움이 조정에까지 옮겨붙여 파당싸움이 난점이나, 손권이 당파를 지었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먼저 조진게 아니라 일단 두 왕자들을 신하들에게 때어낼 생각을 했다는 것만해도 어느 정도는 손권이 처음에는 수습하려는 입장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문제는 두 왕자들이나 그 밑에 붙은 신하들이나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식으로 위기감을 가지고 사태를 에스컬레이팅 시켰고[* 노왕에게 붙은 중소호족들이 자기들 이권용으로 한게 맞긴 하지만 태자파들도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손권도 손화의 종묘사건 이후로 손화에게 정에 떨어졌는데다가 무엇보다 손화에게 달라붙는 호족들이 너무 거물급이라 문제가 갈수록 해결이 안 되었던 것이다. 승상 육손이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육손 본인도 서로 좋게좋게 해결하자고 두 파벌을 화해시키기 보단 무턱대고 전종을 인신공격할 정도로 한쪽의 의견에 너무 쏠려 있었는데다가 여일 사건때 강경하게 나가지 못하고 [[반준]]에게 책임을 떠넘겼던 점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그 반동으로 이번엔 지나치게 강직하게 나서며 손권과 감정싸움을 한것도 일의 이성적인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궁지쟁, 혹은 남로당쟁은 누구 하나가 잘못 안했다는게 아니라 오나라 내부의 사소한 알력다툼이 어디까지 어그러질 수 있나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결국 손권은 극단적으로 남당과 노왕을 다 폐해버리는것으로 답해 버렸고 말이다.[* 문제는 그 뒷처리였다. 사실 손화, 손패의 몰락 후 태자로 정해진게 손량이라 그렇지 사실 손량 위에는 손휴가 있었고 손권 사망 당시 17세로 성인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손량보다야 8살이나 많아 손화도 싫고 손패도 싫다면 그나마 안전한 선택지였는데 하필 손량이었다. 당시로서 손휴는 친정이 충분히 가능할 나이였지만 손량은 보좌가 필요했고 그것이 문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