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궁지쟁 (문단 편집) === 손권의 책임 === 육손이 불씨를 붙였더라도 손권에게도 큰 책임이 2가지 존재한다. 첫번째는 처음부터 손화와 손패의 구분을 하지 않은 것, 나중에 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후계자 문제는 언제 바로잡았는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핵심이다. 육손이 책임이든 손패파의 책임이든 손권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해놓았다면 군주가 처음부터 명확히 그어놨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손노반 정도가 있겠지만 군주의 뜻이 확실하다면 일개 공주 정도가 어찌할 수가 없다. 당초에 이것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손권이 태자 외 번왕을 두려 하지 않은 것 자체도 문제일 수 있다. 이 문제는 주나라의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는 전통에서 시작되는 문제이므로 천자인데 제후를 임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로 거론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 당장에 동생들을 그토록 경계한 조비도 적어도 동생들을 친왕으로 삼긴 했다. 심지어 이후 결국 타협책이랍시고 손패만 왕으로 삼은 것 또한 손패가 아무래도 손권의 남은 아들들 중에 가장 연장자라 그럴듯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일종의 편애처럼 보일 여지가 있는 것도 맞는 말이다. 결국 손권이 처음부터 손화와 손패 두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것이 육손의 책임을 떠나 발단을 제공하였다. 육손은 단지 거기에 불을 붙였을 뿐. 후계자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서 삼국시대만 해도 북방 4개주를 차지하고 있던 원소의 세력이 원소 사후 갑작스레 몰락해버린 것도 후계자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해서 원소의 자식들끼리 서로 싸우다 조조에게 격파당한 것임을 감안하면 육손이 이궁지쟁을 열었다 할 지라도 그 발단을 제공한건 손권이다. 두번째는 이궁지쟁의 마무리 관련이다. 여기서 책임이 있는 양대 핵심인물인 손화와 손패 두 사람을 처벌한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 후계자가 하필 손량이다. 손량은 손권의 아들들 중 제일 막내인 것도 모자라 즉위 당시 9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다. 손량도 총명한 면모가 있긴 했지만 즉위 당시의 나이가 어려 제갈각, 손준, 손침 같은 이들이 실권을 잡았지 본인은 별 일을 못했다. 문제는 손량 시기의 실권자들은 하나씩 문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제갈각은 합비신성 공략 실패 후 엇나갔고 제갈각을 주살한 후 떠오른 손준은 근친상간을 했다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문제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손준의 뒤를 이은 손침도 문제있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 모든건 손량이 성인으로서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있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으나 그러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럼 정말로 손화, 손패를 배제하고 손량밖에 대안이 없었냐면 그건 아니다. 손패 아래로 손권은 손분, 손휴, 손량이라는 세 아들이 더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들은 손권 사망 당시를 기준으로 각각 손분 17세에서 28세 사이[* 손분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손휴는 17세 손량은 9세다. 즉 손권 사망 당시 손분은 성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손휴는 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17세라면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라서 둘 다 손량보다는 안전한 선택지다. 그나마 손분은 생떼를 부리거나 놀고먹기만 하는 등 부정적인 기록을 빼더라도 손휴가 있다. 손휴의 경우 손량이 손침을 몰아내려다 폐위된 후 손침에 의해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진 인물인데 겨우 두 달 만에 역으로 손침을 날려버린걸 보면 손휴의 자질도 제법 있을법하다. 즉 손화, 손침 싫고 손분이 영 아니다 싶으면 손휴가 대안이지 손량이 대안인게 아니다. 뒤에 나오는 '후계 선정과 숙청에 관하여'에서 후계자를 선택할 권리는 군주에게 있고 성리학적 질서는 아직 없었다며 옹호하고 있는데 그래도 손량은 너무했다. 다른 아들이 없어서 손량을 지정했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아들이 손패 아래에서 손량 사이까지 둘이나 있고 손분을 빼도 하나가 있는데 이게 어떻게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차라리 손휴가 손분처럼 함량미달이라면 또 몰라도 그것도 아니다.[* 물론 손휴가 이 때는 손량처럼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수는 있다.] 그리고 장자승계의 원칙은 성리학만의 원칙이 아니다. 주나라때 종법제가 탄생한 이래 군주의 자리는 왕-왕자-왕손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이 원칙에 따르면 왕이 있고 왕이 태자와 태손을 세웠는데 태자가 먼저 죽으면 태자 다음 아들이 아니라 태손이 잇는다. 즉 태자와 그 자식들 사이에는 명백한 급이 있고 그렇기에 태자 외의 자식들은 승계에서 배제된다. 물론 이 원칙이 꼭 잘 지켜진건 아니다. 한나라 시대에만 해도 실컷 어겨지는게 이 원칙이었으니. 그러나 적어도 사대부 같은 유교에 충실한 집단에서는 장자승계를 중요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장에 이궁지쟁에서 손화파에 속한 인물들이 여기에 드는 편이며 위나라의 경우에도 후계를 누가 이어야 하는지 조비와 조식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을 때 조비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지지한 모개, 환계 등도 이 라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보면 후계를 정하는데 있어 장자를 따지는게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손권의 세 번에 걸친 후계자 지정에서도 손등과 손화는 선정 당시 장남[* 손등-애초에 장남으로 태어남, 손화-삼남이지만 둘째 형과 첫째 형이 차례로 죽어 사실상 장남]이지 않던가.[* 물론 이런 면을 보면 손등의 아들을 태손으로 세우는게 더 정석이긴 한데 아들들이 너무 어렸던 모양. 게다가 당시 손권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라 어린 후계자를 세우기에는 좀 그랬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왕위 계승의 법칙은 한번 정해지면 군주의 권위로 쉬이 깨뜨릴 수 없다. 한번 원칙이 정해져서 몇대를 내려오면 전통이 되고 나중에는 그 원칙 자체가 정통성이 된다. 달리 말하자면 원칙을 한번 깨뜨리면 그만큼 정통성이 깨져 권위가 위협받게 된다. 비록 손오는 아직 개국 초기단계이지만 한나라 시절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고 유학적 분위기 역시도 남아있는 상황에서 장자를 세우는 것이 차라리 안전한 선택지다. 피차 손화나 손패나 둘 중 누가 특출나다 할 정도가 아니라면 장자계승이 낫다.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차이로 정해지면 정해지지 못한 쪽은 불복할테니. 즉 손권이 손화와 손패가 파벌을 이루어 다툰 이궁지쟁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핵심인물인 손화와 손패에게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두 배제해버린 것 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굳이 말하자면 안 바꾸는게 더 상책일 것이다. 이러면 손화파의 승리가 되지만 그래도 즉위했다면 20대인 손화가 9살에 불과한 손량보다야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심지어 태자라는 지위도 있었으니 누가 감히 손화를 폐위하려 시도하기도 뭣하다. 이미 손패라는 실패사례가 있기 때문.] 그러나 그 다음 후계자가 손량이라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실리적인 이유에서도 도저히 납득가지 않는 선택이다. 결국 손권의 잘못은 이궁지쟁의 발단의 제공과 잘못된 뒷수습이다. 아무리 이궁지쟁에서 손화, 손패를 배제해 더이상의 논란을 끝내고 문제를 일으킨 자들도 다 청소했다고 한들 9살짜리에게 후사를 맡기니 조정은 한동안 신하들 위주로 굴러갈 수 밖에 없는데 통일왕조인 한, 당, 송, 명, 청 같은 시대라면 모를까 삼국시대 같은 전란의, 혼란의 시대에 어린아이에게 후사를 맡기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당장에 위나라의 경우 조예가 조방이라는 듣보잡 어린애를 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자 위나라 정치는 불안정해졌고 이를 기회로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조상을 축출하고 자기가 정권을 차지했고 그 이후 위나라는 사마씨 가문에 무너지고 만다. 그나마 오나라에는 손씨가문을 엎어버릴 세력가도 없고 손준과 손침도 어쨌든 손씨가문이며 결국 손준-손침의 시대를 끝장낸 것도 황제인 손휴인 문제가 되지 않았지 손씨가 아닌 다른 가문이 힘을 얻었다면, 그리고 황제가 이들을 쫓아낼 수 없었다면 오나라가 위나라 꼴이 나지 않았을거란 법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