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구(1931) (문단 편집) == 생애 == 그의 형 [[이진(1921)|이진]]은 아직 아기였을 때 의문의 병으로 갑자기 [[요절]]했고[* [[1921년]] 8월 출생 ~ [[1922년]] 5월 사망. 한일혼혈인 황손이 다음 황실(이왕가)의 최고 수장 직위를 계승한다는 것에 반발하여 반대파가 아기 먹는 음식(이유식, 또는 우유 등)에 이상한 잡다한 것을 풀어 결국에는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로 성장했다.[* [[이방자]] 여사 회고록에 의하면 그 사이 유산을 2번 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영친왕|이왕 은(李王 垠)]]의 [[이왕가|후계자]]로서 '이왕세자(李王世子)'라 불렸다. [[1947년]] [[10월 1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일본]]의 신 헌법 [[일본국 헌법]]('''평화헌법''')의 제정으로 인해 일본 황실 직계를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과 이왕가(구 [[대한제국]] 황실)는 [[신적강하]]를 당해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일본 국적이 박탈되었고, 모든 재산을 국고로 몰수(압수)당한 뒤 거리에 내몰려 무일푼 [[평민]]이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image.design.co.kr/1276972871143.jpg|width=100%]]}}} || || {{{#fff '''1958년 경 미국에서 촬영한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이구.[br]그 외 왼쪽부터'''}}} [[영친왕|{{{#fff '''영친왕(의민황태자),'''}}}]] [[이방자|{{{#fff '''이방자 여사.'''}}}]] || 그는 [[8.15 광복]] 후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귀국하고자 추진했으나, '돌아오면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정치적인 명분을 내세운 [[이승만 정부]]에 의해 영구 귀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리[* 1923년 3월 18일 출생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결혼 전 이름은 줄리아 멀록이며 한국명은 '''이주아(李珠娥)'''. 이구보다 8살 연상으로, 합의이혼 후에도 개명하지 않고 줄리아 리로 살았다. 이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마침 줄리아 여사는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 제작 때문에 한국에 와 있었다. [[장례식]]에 찾아갔지만 초대를 받지 못하여 먼 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창덕궁 낙선재]]에 살던 때 줄리아 여사와 [[이방자]] 여사 간에 불화가 있었지만 화해했고, 이혼 후에도 이방자 여사가 종종 찾아가 생활비도 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줄리아 여사는 애증의 연 때문인지 몰라도 많이 슬퍼하기도 했었다.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에서 살다가 그곳을 떠나 [[1995년]]까지 [[서울특별시]]의 외국인 아파트([[이태원]] 인근)에서 살다가 [[하와이]]로 [[이민]] 가서 [[2017년]] [[11월 26일]] 숨을 거두었는데 너무 조용하게 살다보니 사망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09732171?sid=103|부고기사]]]와 [[1959년]] 결혼했다. [[유학]]가려 했을 때 이방자는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은 "구(玖)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고 적극 밀어주고 뒤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32세였던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주선 하에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여러 사업을 영위하고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강사 자격으로 출강하여 선진 건축기술을 가르치는 등 나름대로 잘 살았으나,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와 별거하는 등 실의에 빠진 삶을 살다가 [[1977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다가 [[1982년]] 아내와 정식 이혼했는데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일단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구의 바람끼와 종친들이 이구더러 줄리아와 이혼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오랫동안 종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1990년대에 [[일본인]] 무녀 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와 혼인신고를 비공식적으로 올렸다고 한다. 이구는 주로 [[미국]] 아니면 [[일본]]에서 지냈는데[* 이구는 줄리아 리 여사와 결혼하여 취득한 [[미국 시민권]]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이중국적]]자였다. 사망 당시에도 그의 품에서 [[미국 여권]]이 나왔다고 한다.] 한국에 거주할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전주 이씨]] 종친들과 갈등을 겪은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묘제례]]가 있을 때 아니면 거의 한국에 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일본어]]나 [[영어]]를 주로 했다고] 어쨌든 마지막 황태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대한제국 황실]]의 적손(직계손)으로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명예 총재' 직책을 갖고 있었다. [[2005년]] [[7월 16일]], 과거 자신이 살던 저택을 개조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묵고 있을 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향년 73세에 사망했다.[* 정확히 말하면 옛 이왕가 저는 구관(철거된 신관과 달리 지금도 남아 있다.). 그가 머물다 사망한 곳은 신관.] 그런데 [[일본 황실|일본 황족]]들 중에서 이구의 친손이라며 구 한국 황실가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구는 [[일본 황실]]로부터 약간의 연금과 생활 보조비를 지급받기는 했다. [[이방자]]를 통해서 모계로 [[아키히토]]와 [[6촌]] 관계[* 아키히토의 어머니인 [[고준 황후]]가 이방자와 사촌 관계이며 부계로는 이방자와 아키히토는 7촌이다. 우연이지만 이방자는 아키히토의 아버지 [[쇼와 덴노]]와 19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1989년 같은 해에 사망했다.]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구의 [[시신]] 유품 일부를 몰래 일본에 가져가기도 해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대한제국 황실 복원]] 관계자들을 격분하게 했다.(2008년 《월간 중앙》 참조)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 슬하 친자식은 없으며 양녀 이은숙은 사실 이구가 아니라 줄리아 리가 이구와 이혼하기 전 한국에 살고 있을 때 입양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이은숙이 이구와 관련한 일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줄리아 리는 [[하와이]]에서 이은숙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의 사후 회사원 [[이원(1962)|이상협(이원)]][* [[의친왕]]의 9번째 아들 황손 [[이해룡|이갑(이해룡)]]의 장남, 본명은 이상협.]이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지명받았다. 이를 정식으로 인정해야 할지는 논란이 있는데 현행 [[민법]]상 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는 생전 이구가 이상협을 양자로 지명하는데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라 하더라도 법적 절차는 이구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이석]]은 황실 인사들과 전혀 상의도 없이 종약원 회장과 이구가 일방적으로 이상협을 양자로 지명했다는 것, 대동종약원 자체가 황실과 혈통상 거리가 한참 멀다는 것 등으로 인해 이 양자 지명을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이원은 이구의 후손(양자)으로서 현재 [[조선왕릉]] 제례나 종묘대제에 대한 총괄, 전반적인 [[제사]]를 맡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남양주_홍릉과_유릉_회인원 문화재청.jpg|width=100%]]}}} || || {{{#fff '''이구의 '''}}} [[무덤|{{{#fff '''원(園),'''}}}]] {{{#fff '''회인원(懷仁園)[* 사진 출처 - 문화재청.]'''}}}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179735|당시 YTN 보도,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 영결식]] [[대한제국]] 시절 예법에 따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전주 이씨|전주이씨 대동종약원]]과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로 이구와 같은 항렬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 겸 공동장례위원장의 주도 하에 장례[* <哀> 大韓帝國 皇世孫 李玖 邸下 永結式 <悼> (애)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 저하 [[장례식|영결식]] (도)라는 명칭으로 당시 [[을사늑약]] 체결 100년, [[광복]] 60주년인 상황 속에서 2005년 7월 24일 장례식을 치렀다.]를 치르고 [[종묘]] 앞에서 노제(路祭)를 지낸 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남양주)|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 권역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의장대에 의해 친히 운구된 후에 아버지 [[영친왕]]의 묘역인 영원 인근에 마련된 [[조선 왕조]] 최후의 왕실 묘역[* 조선의 예법상 왕과 왕비의 묘역은 능(陵), 왕의 사친(왕의 생부 중 왕이 아니었던 자와 왕의 생모였던 [[후궁]])과 왕세자(손)·왕세자(손)빈의 묘역은 원(園)으로 칭하는데 황실이 부활하지 않는 한 '원'으로 칭할 묘역을 가질 황족은 황세손(이왕세자)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외는 [[희빈 장씨]]의 대빈묘, [[폐비 윤씨]]의 회묘, [[공빈 김씨]]의 성묘와 [[소현세자]]의 소경원이 있다.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을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 윤씨는 투기 때문에 용안에 손톱 자국을 냈다가 [[성종(조선)|성종]]과 시모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 폐서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연산군]]이 [[중종반정|폐주였기 때문에]], 공빈 김씨도 아들 [[광해군]]이 [[인조반정|폐주였기 때문에]] 원호를 끝내 되찾지 못했다. 소현세자는 [[인조|비정한 부왕]] 때문에 복권되지 못하고 소현묘로만 불리다가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 대에서야 소경원(昭敬園)으로 승격되었다. 연산군은 생모를 '제헌왕후'로 복위시키고 능호를 '회릉', 광해군도 생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능호를 '성릉'이라 하였으나 [[중종반정|반]][[인조반정|정]] 후 그 관작이 모두 삭탈된 것이다.] 회인원(懷仁園)에 안장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조선 왕조 [[왕실]] 예법으로 거행된 마지막 '진짜 장례식'으로 사실상 그가 대한제국 [[대한제국/황사|황실]]의 마지막 직계손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무형[[문화재]] 전승 차원에서 재현 행사로서 할지는 몰라도 '진짜 장례식'으로 거행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781243|관련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