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수(소설가) (문단 편집) === 이광수만 뭇매를 맞았다? === 이광수는 빽이 없어서 더 뭇매를 맞았다는 의견 또한 있다. 일단 [[일제강점기]] 때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박마리아]]가[* 그 당시 [[교수]]의 유명세는 지금과는 달랐는데, 비단 교수만이 아니라서 대학은 커녕 대학생도 적었기에 대학생도 지금보다 위상이 높았고 군인도 사관학교 출신 군인은 지식인으로 취급받았다. 일단 [[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땄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이승만의 이칭이 '이 박사'로 불리던 시기다.] 전국적인 친일 강연을 했지만 스리슬쩍 넘어간 사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국 강연'과 '기사'는 '''그 파급력 자체가 다르다.''' 또한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지금보다 더 강연에 비해봐도 기사가 일단 증거가 더 분명하게 남고 알려지기도 쉬웠다. 그리고 이광수는 이후로도 난 잘못한 거 없다며 극구 부인하며 스스로 더 [[어그로]]를 끌었다.(...) 애초에 빽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던 셈. 게다가 이광수는 [[창씨개명]] 명령이 오기도 전에 조선 이름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일본식 이름으로 갈아버렸다. 애초에 거의 모든 식자를 독자로 거느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친일짓을 하면 그 정도에 관계없이 유명한 것은 당연하다. 뭣보다도 전 국민의 지탄을 받으며 자유당 정권에게도 버림받고 일가족이 자살해서 비명에 간 [[이기붕]]의 마누라인 박마리아가 빽이 있었을까? 또 한편으로는 '이광수만 까이는 건 억울하다'라는 의견도 있기는 있지만, 이 의견이 왜 말도 안 되는지는 [[피장파장의 오류|다들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이광수는 1948년 작성된 '친일파 군상' 에 ''''광병적(狂炳的) 친일급 열렬 행위자'''' 로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3&totalCount=3&prevPage=0&prevLimit=&itemId=pj&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pj_004&position=-1#|#]] 더 많이 까여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만약 이광수가 [[김동환(시인)|김동환]], [[채만식]], [[최린]]같이 죄를 뉘우치고 진심 어린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까이진 않았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