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수(소설가) (문단 편집) == 생애 == ||[[파일:attachment/Chunwon.jpg|width=100%]]||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 갈산면 광동리의 몰락한 양반 가정에서 소작농 이종원(李鍾元)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동학]]의 농민들에게 발견된 이광수는 곧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당국의 탄압으로 동학이 해체되자 [[1904년]]에 수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상경한 직후, 친일파 [[송병준]]이 이광수의 문학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운영하던 친일단체 [[일진회]]에 이광수를 추천, 이광수는 일진회의 후원으로 1905년 일본으로 유학, 다이세이(大成)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학원으로 편입하였다. 메이지 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발생한 직후, 일제의 회유로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1915년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이후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었다. 한편 1917년에는 결핵에 걸려 고생했는데, 이때 이광수를 간호했던 당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허영숙과 사귀었다. [[1917년]] [[신한청년당]]에 가입한 이광수는 신한 청년당 활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장편소설인 [[무정(소설)|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무정>은 다음해 단행본을 내어 1만 부가 팔렸다. 지금이야 1만 부가 장난이지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인구 25만 명이었고, 1926년까지도 전 인구의 99%가 [[문맹]]이었으며[* 물론 일본어 [[문맹]]을 기준으로 삼은거지만 사실 한글 문맹을 기준으로 삼아도 여전히 인구의 절대 다수가 문맹이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당시 신문 등 출간물들은 한자 범벅이었기 때문에 한글을 알아도 한자를 모르면 신문과 잡지 같은 당대 출간물을 읽기가 힘듦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별 다를 건 없었다.], 1930년에 이르러서도 70% ~ 80% 이상이 문맹이었다.[* 실제로 남이든 북이든 간에 현대 수준으로 문맹률이 급속도로 줄기 시작한 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일이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만-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것. 당시의 책은 사면 서너 명이서 번갈아 보고 헌 책방에서 바꿔 보기가 예사였음을 감안하면 초초특급 베스트셀러. <무정>의 스토리 전개로 독자들이 젊은층과 노년층으로 나뉘어서 논쟁도 했다고 할 정도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 그의 인기는 단연 톱이었고 이광수는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 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 등이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라며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셋은 귀국 후,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했고 동경 삼재라는 이름은 (일제 시대하) 조선 삼재로 변했다. 이후 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 홍명희는 모시기로 입북했다.]으로 꼽혔다. 이후 이광수는 [[여운형]]의 추천을 받아서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 [[독립신문]]의 발행을 맡았고, 이어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한일관계 사료집 주필이 되어 편찬을 주도했다. [[https://news.v.daum.net/v/20210711120300946|당시 사진(기사에서 3번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EB%AF%BC%EC%A1%B1%EA%B0%9C%EC%A1%B0%EB%A1%A0.jpg|width=250]] 그러나 자금난으로 압박받고 과로로 육신이 피폐해진 이광수는 1921년 2월 16일 애인이자 국내 최초의 [[산부인과]] 여의사인 허영숙을 만난 후 '''안창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허영숙을 따라서 귀국을 택했다. 두 사람은 귀국한 지 한 달이 지난 1921년 5월에 결혼했다. 이광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임에도 귀국한 뒤 총독부로부터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해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일제의 스파이 아니냐는 의혹이 크게 돌았다.[*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p298] 결국 이듬해 1922년 5월 월간 잡지 <[[개벽(잡지)|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친일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광수는 민족 개조론에서 조선은 열악한 민족성으로 인해 '''"쇠퇴 또 쇠퇴"''' 라고 하면서 그 구제의 길은 오직 민족개조운동에 있을 뿐임을 거듭 강조했다. 물론 허술 그 자체인 이론이라 동경 유학생 [[최원순]][* 최원순은 '''열악하다는 조선인의 민족정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하였다. 이어 '그리고 설사 이러한 현상이 있더라도 이는 조선인의 고질적이고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을 가했다.], 학자 신상우, 조선일보 논설 주필 신일용 등에게 가루가 되도록 논파당했다. 참고로 민족 개조론은 [[안창호]]의 이론에서 출발하긴 하였으나 안창호의 이론은 착실히 대비해서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 결과적으로는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내용이다. 이광수의 [[동족혐오]]에 가까운 민족 개조론과는 '''다르다.''' || [[파일:external/search.i815.or.kr/033_007.jpg]] || || 민족적 경륜 || [[1924년]] [[민족개조론]]에 이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 을 기고했다가 크게 물의를 빚고 이광수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 이후 [[동아일보]]에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장편 소설들을 연재했으며, 결국 [[1926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다시 복직했다. 그 사이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에 선과생(選科生: 다른 학교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일본 유학 시절 얻은 폐병 때문에 1926년 9월부터 1928년 3월 31일까지 네 차례 휴학했고, 결국 1930년 1월 학칙에 의해 제적됐다.[[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076215|#]] [[1931년]]에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조선일보]]로 옮겼다. 이후 조선일보에 장편 소설들을 연재하고 글을 썼다.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취임해서 [[1934년]]까지 지냈다. 그렇게 잘 지내나 싶었는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가 그를 투옥하였다.[* 감옥 생활을 무대로 한 단편 무명이 바로 이때를 소재로 했다.] 이후 이광수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 회장을 맡으며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향산광랑)'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향산(香山: 가야마)이란 성은 일본 나라현 카시하라시에 있는 향구산(香久山: 가구야마)에서 딴 것이다. 이광수는 [[진무 덴노]]가 카시하라시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카시하라시에 있는 향구산의 이름을 성씨로 택했다고 선씨고심담(1940년 1월 15일, 매일신보)에서 밝혔다. 향구산은 일본 [[나라 시대]]에 궁궐 후지와라쿄(藤原京)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한 산으로 숭앙받았고, [[만엽집]] 등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역사적·종교적 가치를 인정하여 향구산 등 야마토 3산을 1968년 '역사적 풍토 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였다. (다만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진무 덴노]]가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곳은 야마토 3산 중 우네비산{畝傍山: 무방산}이라고 한다.) 상당수 [[창씨개명]]한 사람들도 어떻게든 자기 본래의 성을 남기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이광수가 만든 성은 많이 지나쳤다. ~~일제 입장에서도 꽤나 불경하다.~~ 한편 이름 '광랑'은 본명 광수를 일본식으로 고친 것이다.]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며 일제의 [[학도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근교 [[사릉]] 인근에 살면서 해방을 맞이했고, 8월 18일에는 군중들 사이에 '친일파 이광수 타도' 같은 구호가 나붙기도 했다. 위의 친일 행위 때문에 먼저 자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1946년에 가족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당대 풍습까지 어겨가며 아내와 합의이혼[* 혼자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던 허영숙은 집안을 잘 돌보지 않는 남편에 대해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친일문제까지 겹쳐서 결국 이혼한 것. 하지만 납북된 이광수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말년에는 이광수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1975년에 미국에서 잠시 귀국하였는데 몇달 만에 사망하였다. 현재 이광수 기념비는 [[봉선사]] 입구에 있다.]을 하고 8촌 친척인 운허의 도움을 받아 [[봉선사]]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체포자 제2호로 연행되나 아들이 혈서를 쓴 덕과 고혈압 증세가 심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어쨌든 이광수가 해방 이후로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폐결핵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건강이 나빴는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명세로 인하여 [[조선인민군]]에게 당시 말하는 소위 "모시기 정책"[*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 진주한 조선 인민군은 유명한 사람들을 '모셔가는' 짓을 많이 했다. '''"전쟁이 났으니 선생님을 안전한 후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라며 회유하다 말 안 들으면 그냥 납북시키는 것. 개중에는 끌려간 사람도 있고, 전쟁과 분단을 장기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냥저냥 따라간 사람도 많다고 한다.]의 일환으로 끌려갔다. 유명인이다보니 이름값을 활용하려고 사실상 [[납북]]한 것이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던차에 맹추위까지 겹치던 와중에 무리하게 강계로 이동하여 병이 악화되었는데, 이광수의 건강상태를 전해들은 벽초 [[홍명희]]가 한때의 친분을 생각하여 [[김일성]]에게 부탁, 강계에서 근처에 있던 인민군 병원으로 옮겨주어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이미 상태가 호전되기에는 늦었던지라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사실 납북된 후 폭사했다고 추정하는 [[정지용]]보다는 편하게 갔다. 김일성은 이광수를 혐오했는지 1955년 12월의 유명한 '주체연설'에서 "리광수는 또 조선사람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동조동근》이라고 떠벌이던 놈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자를 내세운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로 못한다고 막았습니다."라고 마구 욕했다. 뭐, 당대에도 욕을 많이 먹었던 네임드였기도 했고, 광복 이후로는 오늘내일하는 병자였으니 의미에서는 6.25 전쟁 중에 적당히 죽은 것이 더 험한 꼴 보지 않고 간 격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 끌려가서 사망했다는 설, (1980년 당시 기준으로) 현재 나이가 많아서 작품 활동은 안 하고 편히 산다는 설, [[문예봉]]을 유혹했다는 설, 모 어용 단체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숙청당했다는 설[* 퀴즈 아카데미에 문제로 나왔다.]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남북교류가 점차 이뤄지면서 이 설이 정설이 되었다. 삼남 이영근이 1991년 [[북한]]을 방문해서 이광수가 북한 당국에게 자강도 강계로 이송되던 중에 동상이 심해져 10월 25일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또한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회의에서 [[제헌 국회의원]]출신의 [[최태규]]가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후송 중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2006년 발견된 미국 CIA의 기밀문건에서도 이광수의 행적이 확인되었는데, 평양 교도소에서 10월 10일 석방되었던 농학자 신동기가 자신이 석방될 당시에 이광수가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신동기는 납북된 이후 북한 측에 전향 권유를 받았지만 거부하자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10일에 석방되었고, 자신이 석방될 때 이광수와 [[김동인]]의 이복동생으로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김동원(정치인)|김동원]], 독립운동가 출신 [[명제세]] 등이 수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증언과 문건들을 종합하면, 이광수는 10월 10일까지도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자 이를 보고받은 [[홍명희]]가 [[김일성]]에게 부탁해 국군이 평양을 수복한 10월 20일 이전에 임시수도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이광수를 후송시켜달라고 부탁하여 만포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병원까지 가지도 못하고 차안에서 사망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907028003&wlog_tag3=naver|#]] 사망한 이후 자강도 만포군에 그대로 시신을 묻었는데, 폭격으로 무덤이 평지가 된 이후에 그 위로 그대로 아파트를 올려서 한동안 무덤조차 없는 신세였으나 이광수를 다시 안장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서 아파트를 철거하고 이광수 유해를 발굴해서 재북인사릉에 묻었다. 2003년에 [[북한]]의 [[재북인사릉]]이 조성되었을 때 이장되어 현재 무덤은 재북인사릉에 있다. 북한에서도 문학적으로 인정한다는 얘기이다. 김일성과 달리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김정일의 구시대 예술가 복권 사업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