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수(소설가) (문단 편집) == 기타 == * [[일제강점기]] 당시엔 얼굴 잘 생기고 머리 좋고 글 잘 쓰는 [[셀럽]]이었다. 당시 잡지를 보면 이광수 씨가 최근 집필하는 소설이 무엇이고 이광수 씨 집안 인테리어가 어쩌고 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걸음은 못나게도 안짱다리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출처는 별건곤 제 63호의 각계명남명녀(各界名男名女), 뒤로 본 인물학(人物學).] * 연애사와 가정사가 복잡한 편인데 첫 번째 아내인 백계숙과 합의[[이혼]]했고 신여성과 자유연애 끝에 당시 엘리트이고 이름난 [[산부인과]] [[의사]]인 허영숙과 [[재혼]]했다.[* 그런데 이게 상해 임시정부 활동 시절에 일어났다. 임정 사람들은 이광수가 독립운동의 의지가 약해져서 허영숙을 사귀더니 '''임정을 버리고 그녀와 서울로 도망친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이광수는 배신자라고 인식되었다. 일례로 임정 인사였던 안창호는 일경에 붙잡혀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했다.'''] 여기까지는 당시 엘리트들 사이에 흔한 일이었지만 허영숙과 사귈 때 당시 신여성이었던 [[나혜석]]과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광수는 나혜석과 새롭게 연애를 시작했을 때 허영숙과 헤어지지는 않았고 둘 다를 애인으로 두려고 했다. '''허영숙에게는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오라고 하고 나혜석과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만 만나는 것'''으로 날짜까지 정했는데 이광수는 정해진 요일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며 꼭 그 요일에만 만날 것을 요구했다고. 이걸 안 허영숙은 당연히 펄펄 뛰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요 때문에 결국 허영숙을 선택했다. * 그는 [[이성애]]자였지만 [[동성애]]를 소재로 한 글을 자주 쓴 편이었다.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남다른 [[작가]]였던 셈. [[일본]] 메이지 학원 유학 시절 학원 내 발행물 『백금학보』에 <사랑인가>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 하나를 투고한 적이 있는데, 내용은 '문길'이라는 한 소년([[중학생]])이 동급생 '미사오'를 연모해 [[러브레터]]를 보내고 [[혈서]]까지 쓰고 난 뒤 귀국 바로 전날에 그를 만나러 [[시부야]]에 가서 하숙집을 찾아갔으나 미사오가 보여지지 않자 거절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철도 [[자살]]을 꾀한다는 내용.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동성애]]적으로 사모하는 내용이니 그의 [[친일]]적 시각을 드러난다는 주장이 있는데 순 어거지다. 이 단편은 이광수의 2.8 독립선언, 상해 임시정부 활동은 물론 경술국치보다 이른 1909년에 발표되었다. <[[무정]]>에서는 묘한 대목이 나오는데 [[주인공]]이 잘나보이는 자기 동성 [[사촌]]들하고 같이 자고 싶지만 꾀죄죄해서 따돌림당한다는 묘사가 나온다. 1918년에 기고한 <윤광호(尹光浩)>라는 소설은 조선인 [[유학생]] 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며 최초의 현대 한글 [[퀴어]]문학이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https://ko.wikisource.org/wiki/%EC%9C%A4%EA%B4%91%ED%98%B8|윤광호(尹光浩) 소설전문]] * [[여운형]] 딸의 회고에 따르면 여운형이 출옥 후에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변절한 이광수는 뻔뻔하게도 병문안 한다고 여운형을 방문했고 여운형은 소화불량증으로 고생하는 중이었는데도 열 받아서 찬물을 연거푸 들이키며 그를 외면했다고 한다. 이광수는 여운형이 기분 나쁜 걸 알고 나갔고 그가 나간 뒤 여운형은 그를 일컬어 '''[[이스카리옷 유다]]''', 배신자라며 신나게 깠다고 한다. 여운형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점에서 최고의 욕을 한 셈이다. 임정시절만 해도 이광수는 "한천에 비를 내리고 고목나무에 꽃을 피울 정도로 탁월하다" 고 여운형을 극찬했으니 배신감이 유난히 컸을 것이다. 참고로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 교과서에서 친일로 규정하였다'''. *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도 3년 밖에 마치지 못하고 자퇴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최서해]]의 등단을 도와준 은인이다.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엄청났으나 이를 만개할 형편이 안 되던 최서해가 보낸 글도 평론을 해주고, 그의 시를 문학잡지 《학지광》에 소개하여 등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로 인하여 최서해가 자기체험에 기반한 계급주의적 작품들을 집필하고, 이광수에 비판적이었던 [[카프]]에도 참여하였지만, 이광수를 평생 존경했다고 한다.[* 최서해가 1932년 사망하여 변절한 이광수를 보지 못해 존경했다 운운하는 주장이 있는데 최서해 마지막 직장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학예부장이다. 일평생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며 한이 맺힐 대로 맺힌 최서해는 돈도 제대로 안 주면서 선언문 비슷한 글만 요구하는 카프에 진절머리쳤고 먹고 살기 위해 총독부 기관지조차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서해]] 외에 [[채만식]]과 [[한설야]]가 이광수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등단했다. 풍자소설을 즐긴 채만식은 대학 선배이자 은인인 이광수 역시 예외없이 풍자했고(인간적으로 싫어한 건 아니다.), 월북한 한설야는 북한 체제에 영합하면서 이광수를 가열차게 비난했다. * 우스개소리로 "이광수는 뭘 썼을까요?" 란 질문의 답이 "'''[[안경]]'''을 썼습니다."라는 옛날 개그가 있다(...)[* 이 개그는 [[김동인]] 버전으로 나오기도 한다.]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재학한 적이 있으며, 경성제대 [[학번|재학번호]] 1번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광수는 1926년[*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처음 예과를 개설하였고 이들이 본과로 올라가는 1926년에 본과를 개설했다.] 당시 34세로 이미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편입해 다니다 중퇴한 이력이 있어서 선과생(選科生)으로 입학했다. 선과생은 다른 학교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것으로 수료로 인정되고 졸업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당시 영문과의 사토 기요시(佐藤淸) 교수가 “당신은 조선 소설계의 태두인데 왜 여길 들어왔소”라고 묻자 이광수는 “와세다에서는 철학을 했지만 영문학을 한번 공부하고 싶었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https://news.joins.com/article/7492694|#]] * 그의 가족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둘째딸 이정화 교수가 있다. 이정화 교수는 [[6.25 전쟁]]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으나 1998년까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분자생화학 박사로 1980년대에 4차례 한국의 대학에 초빙교수로 오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정화 교수의 남편은 인도인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아직도 이광수의 작은딸 이정화는 잊을 만하면 신문지상에 나와서 [[안창호]] 선생을 팔아먹으면서까지도 "나의 아버지는 민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항변했다. 이는 현재도 다를 바가 없어서 2014년 10월 13일 <[[조선일보]]> 인터뷰에 등장하여 "아버지를 미워하는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라는 말로 아버지의 친일 행적에 대한 변을 남겼다. 정확히 1주일 뒤에 前 광복회 회장인 [[김우전]] 씨가 "(이광수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들었다. 나는 춘원의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하고 이야기하며 이광수의 딸 이정화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 1990년대 후반에 <월간중앙>을 통해서 발표한 재미 의사[* 춘원의 아들의 친구이다.]는 열렬한 이광수 지지자로서 조정래를 제외한 이광수 비판자들을 까는 서적인 <춘원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 의하면 이광수는 일제가 조선인 수십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이라고 한다. [[생체실험]] 등의 일을 벌인 일본으로서는 [[연합군]]의 본토 상륙시 그런 일을 충분히 벌일 개연성은 있다. 사실 [[보도연맹]]도 일본에서 만든걸 참조한 것을 본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정도 기밀사항을 춘원 정도가 알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일본군]]이 막장이라고 해도 일개 소설가에게 군사 기밀을 흘릴 정도의 병신 집단은 아니다. 이광수가 친일을 한다고 학살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본인이야 친일을 하면 일본한테 밉보일리 없으니까 학살을 면할 수 있었겠지. 또한 이 책은 임병직과 임종국도 구분 못하고 동학 혁명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류]]가 많은 책이라 순순히 믿기엔 여러가지로 무리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