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관술 (문단 편집) === 이재유 그룹 활동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재유화질좋은.png|width=100%]]}}}|| || '''[[이재유]]'''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경성트로이카]]’(1933. 8.)-‘경성재건그룹’(1934. 11.)-‘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6. 10.)은 국제공산당과 그 산하의 국제적 지도기관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국내의 다른 그룹들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재유는 당을 즉각적으로 건설하려는 방식을 반대하고, 생산현장에서의 대중 활동과 대중투쟁의 확대 · 강화를 통해 당재건의 인적 ·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유는 ‘트로이카운동’을 제안했다. 즉 몇몇 지도부가 당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여 널리 동지를 획득하고, 때가 되면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이관술이 석방된 지 4일 후인 4월 13일 이재유가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했다. 이재유의 탈주 소식에 막 석방된 이관술은 설렜고 당장이라도 운동선상에 복귀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이관술은 폐병으로 건강이 몹시 나빴다. 그는 당시 기분을 회상기에 써놓았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내가 나온 지 3, 4일 후에 이재유 동무가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에게는 큰 충동을 준 사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도로 운동선상으로 들어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일종 형용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이었다. 나와서 보니 내가 검거될 때 잔류해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그간에 전부 잡혀 들어갔고 새로 활동하던 동지들 역시 이재유 사건으로 일망에 타진된 형세라 경성 중심의 운동은 전부 파괴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동지가 그립고 일본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하고 참말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전전긍긍하며 요양하다가 결국 이재유를 찾으러 1934년 8월 하순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1934년 9월 중순 박진홍과 이순금의 노력으로 이재유와 접촉한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장충단공원 뒤 <앵구> 약수터에서 암호에 의해서 서로 알아보고 손을 잡았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재유 동무의 첫인상은 논리가 명철한 것 매사에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 그러고 대단히 사무적인 것이 특색이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재유와 만난 첫날 이관술은 지식인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기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일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재유의 생각은 달랐다. 이재유는 이미 이관술에게 몇몇 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맡기려 계획하고 있었으며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적당한 부서에서 당장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관술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도 이재유와 상의한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관술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관술은 상의 결과 재판에 출석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일단 자유의 몸이 된다. 이관술이 활동한 [[경성트로이카]] 2기 조직의 정식명칭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이다. 이관술은 학생부문을 맡았다.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은 노동운동 분야를 총괄했으니 이관술은 이재유와 나란히 경성재건그룹의 핵심 인물이 된 것이다. 경성재건그룹은 학교와 공장에 독서회를 만들어 지도하고 여러 종류의 팸플릿을 발간해 경성과 인천 지역에 배포한다. 이인행, 이석면, 공성회 등 1기 경성트로이카에 관련된 인물과 접촉하는 책임은 이관술이 주로 맡았는데 그 결과 상당한 정도로 조직이 재건되었다. 이관술이 접촉해서 조직에 가입시키는 등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은 전체 조직원의 30%가 넘는 높은 비율이었다.[*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9쪽. 판결문에 따른 것으로, 관련자 30명 중 10여명이 이관술이 맡은 사람이었다.] 이관술은 이 때 이미 일제의 수배자 명단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거물급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성재건그룹지도부.png|width=100%]]}}}||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경성재건그룹]]의 목표는 연말연시를 기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경성의 또다른 노동운동 조직인 권영태 그룹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을 이관술이 맡았다. 이관술은 연말의 총파업을 준비하자는 내용의 팸플릿 등 경성재건그룹 문건을 가지고 권영태 그룹과 접촉한다. 권영태는 자신이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아 파견되어 왔으므로 이재유 그룹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권영태는 이관술의 제안을 일축했고 경성 지역 양대 조직의 통합은 실패한다. 그러나 석 달 만인 1935년 1월 검거 선풍을 맞는다. 이인행과 박진홍, 박영출이 체포되었다. 조직원들은 돌아올 시간을 정하고 돌아올 시간이 10분 이상 늦으면 몸을 피해 주변에 숨고 한 시간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완전히 체포된 것으로 간주해 도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붙잡힌 조직원은 24시간 동안 고문에 버티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재유는 이관술의 은신처로 피신했지만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이재유와 이관술이 유순희, 이종희 등 동지들을 구출하고 잠적시키는 과정은 인력거를 6차례나 바꿔 탈 정도의 숨가쁜 추격전이었다. 같이 있던 동지들을 잠적시킨 뒤 이관술과 이재유는 비밀 서류들을 땅에 묻어 두고 목적지를 정하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관술의 회상기에 따르면 경기도 경계를 넘은 두 사람은 강원도 수성을 지나 홍천과 춘천까지 도보로 배회한다. 두 사람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맞는 복장으로 변장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구실을 짜냈다. 이 때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변장법을 알려주었다.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식당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밥을 사먹는가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알려주었다. 이관술은 이때의 배움을 밑천 삼아 변장술의 귀재라 불릴 정도의 도피술을 터득, 해방이 되기까지 왜경을 농락한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두 사람은 두 달 간 강원도를 배회한다. 이관술은 친척들에게 이 당시 이재유와 겪었던 웃긴 일화를 이야기해주곤 했다. 폭설이 산야를 뒤덮은 산중에 갇힌 이관술과 이재유는 꼼짝 못하고 눈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1월의 한파 속에 노숙을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두 사람은 옷을 몽땅 벗어 바닥에 깔고 알몸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서로의 온 몸을 손으로 문질러 열을 냈다고 한다. 알몸으로 부비기 사흘 만에야 마을을 만나 살아날 수 있었다고. 두 사람은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신주막동 비석골, 지금의 서울 창동 부근으로 와 수해민 형제로 위장한다. 김대성, 김소성 형제로 위장하여 사는데 나이가 많은 이관술이 형이었고, 이재유가 아우였다. 지명수배자와 탈옥수 신세였던 이들은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재치있게 살았다.[[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62297|출처]] 버려진 임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다. 나중에 이 곳을 방문한 기자에 따르면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장정 둘이 지냈을까 놀랄 만큼 협착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관술이재유아지트.png|width=100%]]}}}|| ||'''이관술과 이재유가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는 상당히 두꺼운 분량으로 이관술은 거의 모든 시간을 적기의 제작에 쏟았다. 한편 이관술과 이재유는 김희성의 '콩그룹'[* 이 단체는 경성콤그룹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이관술이 만드는 경성콤그룹과는 다른 단체이다.]이라는 조직과 연대하려 했는데 거부당한다. 이후 이관술과 이재유는 조직 명칭을 '경성재건그룹'으로부터 '경성준비그룹'으로 바꾼다. 적기 제1호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부 명의로 1936년 10월 20일에 발행되었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상당한 명문장으로 이루어졌다". 적기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이 현대적이다. 당시로서는 환상에 불과했을 내용들이 현대에 와서 대부분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 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 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 부르조아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 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하다.].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 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 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 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관술과 이재유가 만든 《적기》의 슬로건[*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p323~324]}}}}}} 식민지 조선의 노동환경은 다음과 같이 매우 열악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재유가 묘사한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출처: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 <적기>를 소지한 채 경찰에 체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받으면 이전에 읽은 사람의 지문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모든 면을 쓸어 자기 지문만 찍어놓을 것 * 읽은 후에는 반드시 소각하고 적기를 들고 타인을 방문하거나 배회, 산책하지 않도록 할 것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적기》의 보안 수칙}}}}}} 이들은 적기 제2호를 11월, 제3호를 12월에 완성했고 모두 두꺼운 분량이었다. 적기는 여러 운동가와 신문기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왔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관술은 1936년 12월 24일까지 적기 인쇄를 계속했다. 1936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이관술에게 굳은 악수를 청했다. 이재유가 집을 나선 건 조직원 최호극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재유와 이관술은 몰랐지만 최호극은 이미 경찰에 잡혀 이재유와의 약속을 경찰에 말한 상태였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두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체포된 것으로 알고 달아나라고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이재유는 잡혔고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재유체포.jpg|width=100%]]}}}|| ||'''이재유 체포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당시의 한 신문은 이관술이 "원래부터 실천투사는 아니고 이재유의 심파(sympathizer의 약칭, 동조자, 동정자를 뜻함-인용자)적 존재로서 끌려들어간 것으로 이재유가 없는 이후에는 전혀 자멸할 수밖에 없고 종래와 같은 투쟁은 상상할 수 없으며 ... 이로써 반도 공산당 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 종식하기에 이르렀다"(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경성콩그룹에서의 운동까지 포함하여 이후 그의 활동은 이러한 평가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2007}}}}}}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재유이관술악수로이별.jpg|width=100%]]}}}|| ||'''1937.4.30 <매일신보> 이재유와 이관술…악수로 이별에 / 문제되는 이관술 행방''' || 이관술은 오후 2시가 넘어가자 집을 나서 강원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재유의 체포와 이관술의 도주 소식은 철저히 보도가 금지되었다가 4개월이 지난 1937년 4월 30일 이후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체포 당시 철저히 비밀로 붙이며 보도를 통제한 것은 이관술을 비롯한 남은 세력을 모두 잡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경성 트로이카의 마지막 핵심 지도자가 되어버린 이관술은 잡을 수 없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고특비이관술.jpg|width=100%]]}}}|| ||'''1937.7.21. “경고특비 865-1 치안유지법 위반 용의자의 행동에 관한 건” 경기도 경찰부'''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되지 않은 거물’이라고 불렀다. 이재유와 함께 비합법 혁명운동을 이끌던 이관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경찰은 수사의 초점을 한군데로 집중했다. 경찰은 수사의 초점을 한군데로 집중했다. 바로 이관술이었다. 그를 가리켜 “이재유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혹시 수사망을 피해 국경 너머 만주로 도주한 것이 아닐까, 경찰 기록에는 그런 추측도 적혀 있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임경석]],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085.html|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 2022}}}}}} 이관술은 후일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동지와 통탄의 작별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관술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 항일 혁명운동가 중 가장 으뜸으로 이재유를 꼽았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동거한 기간만 2년이 넘는다. 강원도로 빠져나간 이관술은 산중의 외딴집에서 새끼를 꼬아 망태와 멍석 만드는 일을 하며 겨울을 나는데 그를 좋게 본 주인이 데릴사위로 삼으려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나왔노라고 나중에 가족들에게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이관술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재유가 체포된 지 반년이 지난 1937년 6월 말이었다. 일급 수배자인 이관술이 다시 서울에 돌아오는 데는 대범함 이상의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지도부는 수배자 명단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관술이 영등포 공업지역에 돌아온 것은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였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201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