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비 (문단 편집) == 여담 == * [[취미]]는 [[마작]]과 [[승마]], [[등산]]이었다고 한다. 사정 상 높은 산은 못 갔고 [[성북동(서울)|성북동]] 별장 근처에 있는 [[정릉(서울 성북)|정릉]] 주위 [[산]]을 주로 돌았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12000209206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1-20&officeId=00020&pageNo=6&printNo=12994&publishType=00020|#]] * 남편 [[의친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대신 의친왕이 밖에서 낳은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아꼈다. 오히려 의친왕이 자식들을 돌보지 않아 그 생모가 하소연을 하거나, 또는 생모가 일찍 죽거나 키울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아이들을 [[사동궁]]으로 데려다 직접 기르기도 했다고. 그래서 의친왕의 자녀들도 의친왕비를 '지밀어머니'[* 지밀은 궁의 안방이다. 저기서 말하는 '지밀어머니'는 '사동궁 안방을 쓰시는 어머니'란 뜻이다.]라 부르며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보살#s-5|살아있는 보살]]이셨다.-- 오죽하면 어릴 때 [[계동궁]][* [[숙종(조선)|숙종]]의 3남 [[연령군]]의 종가.] [[이기용(1889)|이기용]][* [[흥선대원군]]의 큰형 [[흥녕군]]의 손자로 계동궁의 종주였다.]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했던 의친왕의 7남 [[이해청|이광]]은 인사동 경성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에 [[유치원]] 수업이 끝난 후 [[사동궁]]에 매일 들러 집(계동궁)에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12000209206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1-20&officeId=00020&pageNo=6&printNo=12994&publishType=00020|#]] * 의붓자녀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다정한 의붓어머니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경]]은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 “자식이 없으셨던 의친왕비는 제게 어머니 노릇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예절|예법]]을 챙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어머니 앞에선 늘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니 매번 도망 다녔죠. 어머니가 하루는 “내가 싫어서 도망가는구나” 섭섭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에요” 하면서 어머니 [[무릎]]에 팍 누워버리면서 “이런 것도 좀 하고 싶어요”라고 [[애교|어리광]]을 부린 적이 있어요.” > ---- > “어머니께서 학교에 [[평등|특별 대우를 하지 말라고]] 청을 넣었어요. 저도 친구들과 똑같이 놀려고 애썼어요. 그래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도시락]] [[찬밥]]을 못 먹었어요. 그래서 [[유모]]가 목판에 따뜻한 [[밥]]을 [[국]]과 함께 가져오면 숙직실에서 혼자 앉아서 먹었지요. 잠깐 그렇게 하다 다시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는데, 찬밥이 안 넘어가서 매일 그냥 가지고 갔죠. 들키면 어머니한테 혼나니까, 유모가 몰래 궁 안으로 [[자장면]]을 시켜줘서 먹곤 했어요.(웃음)” > ---- > “하루는 하교 후 유모가 오기 전에 몰래 [[친구]]네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저녁]]에 궁에서 사람이 와 저를 데려갔는데[* 아마 이해경이 보이지 않아 수소문 끝에 친구 집으로 간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님이 모른 척하고 ‘어디 갔다 왔니?’ 하시더라고요. 당시 [[중일전쟁]] 때문에 상이군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상이군 위문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죠. ‘그래? 뭐했어’ 물으시기에 ‘노래했어요’라고 했더니 ‘해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했죠. ‘그리고 또 뭐했어?’ ‘춤 췄어요.’ ‘그래? 춰봐.’ 이렇게 몇 번을 거짓말했더니 어머니 눈꼬리가 올라가시면서 “이년!”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얼마나 꼬집으시던지··· 그래도 전 잘못했다고 안 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못하느냐는 반항심 때문이었죠.” > ---- >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5591657|출처]] * [[의친왕]]의 서자녀들 뿐 아니라, 다른 황실 가족들도 잘 챙겼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갔던 [[덕혜옹주]]가 광복 이후 귀국했을 때엔 그가 좋아하던 [[산적(요리)|섭산적]], [[떡볶이]] 등 맛있는 음식을 여러 번 만들어주었고 그 뒤로도 음식이 생기는대로 덕혜옹주에게 먼저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각 궁에서 나온 반기[* 잔치나 제사를 지낸 뒤 목판에 몫몫이 담아서 주변에게 나누어 주던 음식.[[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1450|출처]]] 중 사동궁이 제일 후했다는 평판이 있었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12000209206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1-20&officeId=00020&pageNo=6&printNo=12994&publishType=00020|#]] 사실 서열 상으로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순헌황귀비]] 사후에는 나이로 봤을 때 황실 여성 중에서 2번째로 연장자였기에 그에 따른 책임감도 있었던 듯 하다.[* [[영선군]]부인 광산 김씨가 1878년 생으로 의친왕비보다 2살 많았다. 나머지는 전부 어렸다. [[순정효황후]]([[순종(대한제국)|순종]]의 황후)는 1894년 생, [[이방자]]([[영친왕]]의 부인)는 1901년 생이다. 심지어 [[흥친왕비]]는 시백모(남편의 큰어머니)인데도 의친왕비보다 3살 연하였다.] * [[의친왕]]의 5녀이자 의친왕비와 가장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던 [[이해경]] 여사가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회고한 내용이다. [[의친왕]]은 대부분 [[사동궁]] 밖 후실들 집에서 지내다 [[질병]]이 나면 후실과 그 소생들을 모두 데리고 사동궁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친왕이 밥상을 받을 때 의친왕비와 이해경 여사가 자리를 지켰는데[* 손윗사람이 먼저 식사를 하고 손아랫사람들이 퇴선을 받는 전통 규범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부부 다른 상 하나가 뒷방(후실과 그 소생들이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더란다. 그래서 이해경 여사가 "어머니도 안 드셨는데 밥상이 저기로 들어가요?"라고 묻자 의친왕비가 "네 아버지가 귀여운 아이들이 밥도 안 먹었는데 밥이 들어가시겠니?"라고 했다한다. 그러자 이해경 여사가 화가 나서 "어머니는 목석이세요?"라고 하자, 의친왕비는 "내가 인간하고 결혼했니, 법하고 결혼했지" 라면서도, "'''그래도 죽으면 [[합장|네 아버지랑 함께 묻힐 사람은]] 나여'''"란 말을 했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5591657|#]] * 위에 언급한 인터뷰 때 [[이해경]] 여사가 남긴 다른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비가 가끔 어릴 때 먹던 [[시래깃국]]이 그립다며 [[상궁]]들에게 부탁해 먹었다고 한다. 이해경 여사도 일부러 식사 시간에 늦게 가서 시래깃국을 같이 먹었다고.[[https://www.joongang.co.kr/article/5591657|해당기사]] * 의친왕비가 [[의친왕]]의 장남 [[모모야마 켄이치|이건]]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쓴 [[한글]] 편지 일부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명은 〈의친왕비 김씨의 서간(義親王妃 金氏 書簡)〉. 총 3점이며 편지 2매와 봉투 1매가 1조를 이룬다. 10월 6일에 썼다는 것만 적혀있고 연도는 쓰여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https://www.gogung.go.kr/searchView.do?pageIndex=1&cultureSeq=00019239VZ&searchRelicDiv4=&searchGubun=ALL1&searchText=|이 곳]]을 참조. *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으며, [[천주교]] 귀의 이후에는 [[묵주기도]]를 하고 《[[준주성범]]》을 읽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고 한다.[[http://www.imperialhouse.kr/sub02/sub02_01_03_02.php|#]] * 1964년 1월 20일 자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 내용이다. 하루는 의친왕비의 [[친정]]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산삼]] 한 뿌리를 진상했었다. 왕이 먹는 것은 [[기미#s-6|모시는 사람들이 먼저 먹어보는데]], 미리 산삼 뿌리를 씹던 [[내시]]가 "[[독극물|독]]이 든 삼"이라고 말하며 뱉었다. 그 얘기를 들은 고종은 "당장 (의친왕비의) 부모와 삼족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한 [[대신]]이 이 광경을 보고 그 산삼을 씹어삼킨 후 고종에게 "이 산삼은 진품이니 버리시려거든 신에게 내려주십시오"라고 말해 의친왕비의 가족들은 화를 면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12000209206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1-20&officeId=00020&pageNo=6&printNo=12994&publishType=0002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의친왕비 대수머리.png|width=100%]]}}} || || {{{#ffd800 '''전통 예복을 입은 의친왕비 사진[[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A000430443&memcd=00018543&gb=reporter|#]]'''}}} || [[대수#s-5|대수]] 머리를 하고 대례복을 입은 사진이 쌩뚱맞게도 한 때 '''[[샘 해밍턴]]과 닮았다고(...)''' [[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30623000172|출처기사.]][* 기사 원문에는 이름 모를 누군가라고 적혀있다.] 2014년에 [[JTBC]] 《[[마녀사냥(JTBC)|마녀사냥]]》 제작진들이 SNS에 "샘 닮은꼴 제보가 들어왔다. 별에서 온 샘"이라는 글과 함께 의친왕비의 사진을 올렸다.[[https://entertain.v.daum.net/v/20140302112310862?f=o|#]]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