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 (문단 편집) === 광복 후 말년 ===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딱히 정치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회원로 정도로 말년을 누렸으나 [[대한제국/황실|황족]] 재산이 국유화되고 [[대한제국/황실|황실 인사]]를 철저히 배척하던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당한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자녀들(황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전쟁 상황을 겪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9남 4녀 중 5남 3녀는 유아기에 [[사망]]. [[완친왕]]은 [[조선시대]]였던 [[1880년]](고종 17년) [[사망]]. [[순종황제|순종]]은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사망]]. [[영친왕]]은 [[1970년]], [[덕혜옹주]]는 [[1989년]] 각각 [[사망]]했으나 [[6.25 전쟁|전쟁]] 당시에는 둘 다 [[일본]]에 거주.] 개전 후 불과 3일만에 [[서울특별시|서울]]이 [[북한]] [[조선인민군|공산군]]에게 함락당했는데, 북한 치하의 [[서울특별시|서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피죽만 겨우 먹는 생활을 했다.[* 그나마 그 피죽도 딸 [[이해경]]이 목숨걸고 어렵게 겨우 구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1.4 후퇴]] 무렵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피난을 하려니 상당한 고생이 따르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식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양실조]] 및 각종 [[질병]]에 내내 시달렸다. 거기에 [[노환]]이 겹쳐, [[1955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안동별궁|별궁]]에서 [[영양실조]] [[후유증]]과 [[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며칠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3308600|가회동 성당]] 제3대 주임 박우철 바오로 [[신부(종교)|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의친왕은 [[사망]]하기 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할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조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킨 것([[병인박해]])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으며, [[1955년]] [[8월 9일]]을 기하여서도 의친왕 이강은 [[천주교]] 교우이던 [[대한제국/황실|구 황실]](舊 皇室) 서무계장과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을 지낸 [[장면]] 등과 자주 연락하곤 했다.][* 정실 [[의친왕비|김수덕]]도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이복동생 부부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도 각각 '요셉'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의친왕과 [[영친왕]]의 경우는 정식 세례성사가 아니라 비상 세례(대세)일 가능성이 높다. 대세라는 건 [[임종]] 직전의 세례로, 일반적인 세례와 다른 방식이다. 대세에 관한 것은 [[http://simjuliana.tistory.com/616|여기를]] 참조.] 과거의 인기가 무색하게 신문들은 짤막하게 "사동궁주(사동궁의 주인) 이강이 졸(卒)했다"는 기사만 한 귀퉁이에 내걸었다고 한다. 사후 어머니 [[귀인 장씨(고종)|귀인 장씨]]의 묘소가 있는 [[서삼릉]] 묘역에 묻혔다가 의친왕의 자녀들이 [[홍유릉]] 묘역에 매장된 [[의친왕비]] 김씨와의 합장을 추진해 [[1996년]], 시신을 이장해 합장묘로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61126153500450|조성했다.]][* [[덕혜옹주]] 묘역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다. [[이구(1931)|이구]]의 회인원을 지나 따라가다보면 전답이 나오기 직전 구릉 두 개가 보이는데 이 중 더 먼 쪽. 다만, 명목상 석물(석등)이라도 조금 있는 바로 옆 덕혜옹주 묘와 달리 의친왕의 봉분은 그 흔한 묘비 하나 없는데, 후손(이른바 황손)들이 그렇게 두기로 합의한 부분이라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