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치하에서의 행적 === [[1911년]] 봄 의친왕과 [[손병희]]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면밀히 모색했다. 1911년 8월 [[손병희]]가 [[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했고, [[1912년]]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는데, 봉황각은 바로 [[3.1 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1915년]] 의친왕은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상하이]]에서 [[이상설]],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열]]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를 [[베이징|북경]](北京)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 위반 사건[* [[경성부|경성]]으로 잠입한 외교부장 성락형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 김사홍, 김승현, 변석붕, 김위원, 심인택, 박봉래, 정일영, 염덕신, 이경창 등 관련자가 [[1915년]] 이후 전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에도 연루되었다.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추모 제문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은 [[임병찬]] 등 [[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의친왕의 궁가이자 처소인 [[사동궁|사동궁(寺洞宮)]]에는 [[일본제국 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이왕직]] 사무관이 파견나왔으며, 의친왕의 처소에는 [[감시]]를 위한 유리창이 달렸다. 그런데 이러한 삼엄한 [[감시]]를 받아 가면서도 의친왕은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비밀리에 회합했다. [[1919년]] [[11월 24일]]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우치다 고사이]] 당시 [[일본 외무성|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공(公)은 즐겨 시정 잡배와 왕래했는데, 올 봄 [[독립운동]]의 주모자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했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1919년]] 늦가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 [[봉오동 대첩|봉오동 전투]]의 주역이다.]과 연통했다. 이후 [[독립군]] 단체인 '''군무 도독부(軍務都督部)'''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의친왕은 "[[3.1 운동]]을 통해, 침략한 [[일본 제국|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으로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고 《최진동 장군》에 나와 있다. 나중에 [[1939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 [[독립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