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 (문단 편집) === 귀국 이후 === '''늑약'''으로 불리게 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있던 [[1905년]](광무 9년)에 [[미합중국|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제국군|대한제국군 육군]] [[중장|부장]]으로 [[임관]]했으며, 이후 제2대 [[대한적십자사]] 명예총재 등을 지냈다. 정식으로 금책을 주는 절차는 의친왕이 귀국한 후인 [[1906년]](광무 10년) [[양력]] [[7월 24일]]에 거행되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7024_001|의왕 이강에게 옥책과 금보를 주다.]]]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아버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일본제국군|일본군]]의 강요와 협박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복형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했으며, [[1907년]](융희 원년) 9월 의친왕보다 20살 연하인 이복동생 [[영친왕]]이 정식으로 [[대한제국/황사|대한제국 황태자]](大韓帝國 皇太子)로 정식 책봉되었다.[* [[내명부]] 내 [[순헌황귀비|엄귀비]]의 [[파워]]가 막강했고 의친왕의 모친이었던 [[귀인 장씨(고종)|귀인 장씨]]는 이미 [[사망]]했으며 앞서 있었던 '''일심회 사건'''과 [[순헌황귀비|엄 귀비]]와의 다소 껄끄러운 관계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또한 가계가 알려지지 않은 생모 [[귀인 장씨(고종)|귀인 장씨]]의 출신이 천민이라는 설도 있고, 여러 요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황자]]로서 [[대한제국/황사|다음 황위 계승]] 순위로는 [[순종(대한제국)|순종]] 그다음이었으나, 자신의 아들 [[영친왕|영친왕 이은]]을 밀던 [[순헌황귀비]]와 [[영선군]] 이준용 파와 의친왕 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학부 대신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져 결국 [[대한제국/황사|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1907년]](광무 11년) [[1월 15일]], 의친왕이 [[북한산성]]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정미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연설]]을 했는데 실제로 이들 중에는 [[의병]]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다. 대체적인 기록은 참가자 중 하나였던 목형신(睦衡信)에 의해 남아 있으나 228명 전원의 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1909년]](융희 3년) 10월, 의친왕이 [[경상남도]] [[거창군]]의 [[정태균]]을 방문하여 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이 지방의 뜻 있는 사람들과 북상의 사선 대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일부 땅을 매입하려다가 발각되어 [[한성부|서울]]로 호송되었다.(다만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 [[거창군]]에서 편찬한 《거창군지》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관련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오히려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자명감》에 기록된 [[정태균]]의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정태균은 당시에 [[거창군]]의 [[폭도]]를 진압하기 위하여 [[수비대]]를 위해 [[주택]]을 개방하고 임시 막사를 제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태균]]은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해 기념 표창까지 받은 친일적인 인물로서 [[독립운동]]을 할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 pp.396 ~ 397에 관련된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