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 (문단 편집) === [[미국]] 유학 === [[1899년]](광무 3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당시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란사]](金蘭史)를[* 훗날 [[김란사]]는 [[파리 강화 회의]]에 밀명을 받고 참석한다.] 알게 되었다. [[1900년]](광무 4년) 8월에 [[친왕]] 작위를 받고, '''의친왕(義親王)'''으로 승격했다.[* 1900년(광무 4년) [[양력]] [[8월 17일]] '[[친왕]]' [[신분]]의 '의왕'(義王)으로 책봉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8017_001|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 [[1901년]](광무 5년) 3월에 미국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에서 수학했으며, 이 때 [[로어노크 칼리지]] 학생으로 있던 우사 [[김규식]] 등과 인연을 맺었다. 같은해 6월에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고, [[버팔로(미국 도시)|버팔로]]에서 열린 남‧북미 박람회에도 함께 참석으며, 이후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L.A.)에 기거하던 도산 [[안창호]]와는 [[김규식]]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고, [[미합중국|미국]]에 거주하는 재미 [[한인]]들의 복지를 위해 자금(금일봉)을 보태기도 했다. 한편 의친왕이 미국에서 열심히 [[유학]]하던 기간에, [[대한제국]]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다름아닌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대한제국/황실|황실]]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1902년]](광무 6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一心會 事件)'''이 그것으로, [[일본제국|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 정확히는 [[게이오기주쿠대학|경응의숙]]을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1기로 들어간 21명.]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를 [[양위]]시키고 의친왕 추대를 획책한 사건이다. 이후 전모가 밝혀져 [[유길준]], 장인근 등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제국|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 주동자 3인은 체포되어 [[사형|처형]]당했다.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합중국|미국]]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사건 자체는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한 후, 의친왕이 아닌 영친왕이 [[대한제국/황사|황태자]]로 책봉받은 것에도 이 사건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연구|연구자]]들은 본다. [[1905년]](광무 9년) 3월 [[대한제국|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도쿄]]로 갔으나,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명으로 다시 [[미합중국|미국]]으로 돌아갔고, 학자금 명목으로 5만 원을 받았다. 이후 의친왕은 다시 [[1905년]](광무 9년) [[8월 28일]]에 도쿄로 갔는데, 그 소식을 접한 [[순헌황귀비|엄 귀비]]가 [[이근상]](李根湘)을 도쿄로 보내 [[은]] 300만 원을 주면서 돌아오지 말라고 종용하며 압박을 가했지만, 의친왕은 [[순헌황귀비|계모]]의 종용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더 이상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귀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