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친왕 (문단 편집) == 여담 == * [[1905년]](광무 9년)에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귀국 도중 의친왕은 [[도쿄]]에서 [[손병희]]를 우연히 만났다. [[손병희]]가 마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다가 마침 의친왕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했는데, 이때 시종관이 [[영어]]로 무언가 의친왕에게 아뢰자 손병희가 "[[대한제국|내 나라]] [[고종(대한제국)|임금]]을 모시는 놈이 어디 감히 [[영어|외국말]]로 아뢰느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다!"라고 일갈했다. 이에 의친왕이 "그대가 옳다."며 직접 다독였고 이러한 [[손병희]]의 의개에 감복해 통교했다. * 의친왕은 [[1905년]] 워싱턴에 밀사로 찾아온 [[이승만]]을 몇 번 만나기도 했는데 당시 버지니아 주 살렘에 있는 로노크 대학에서 공부하다 종종 주미 공사관이 있는 [[워싱턴]]에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의친왕을 만나보니 '게으르고 학업에 열의가 없다'는 느낌의 인상을 받았다고 하였다.[*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 新太陽社, p. 106] * [[술]]을 잘 먹고 [[여자]]를 좋아하며 [[권총]][* 그래서 의친왕은 [[사격술]]과 [[권총 사격술]]에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사격]]과 [[권총 사격술|권총술]]로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을 잘 쏴서 젊을 때는 파티장에서 [[권총]]을 빼들고 [[샹들리에]]의 등불을 쏘며 쇼를 벌인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확실히 [[범생이]]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탕아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탈출극 이전에나 이후에나 [[일본 제국|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면에서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아버지 [[고종(대한제국)|고종]]보다는 비교적 친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기질을 쏙 빼 닮았던 것 같다.[* 사실 [[흥선대원군]]이 자신과 성격, 기질이 가장 닮았다고 생각한 손자는 장손 [[영선군]]이지만 [[영선군]]은 [[친일]] 테크. 외모는 할아버지 [[흥선대원군]]보다는 아버지 [[흥친왕]]을 닮았다.] * 사실 [[대한제국]]의 [[대한제국/황실|황실]] 인사 중에는 의외의 [[자동차]] 애호가로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당시 탔다고 알려진 [[자동차|차]]는 [[미국]]의 오버랜드였다.[* 현재는 크라이슬러 산하 [[브랜드]]가 되었다. 크라이슬러의 프리미엄 SUV인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버전도 이름이 오버랜드다.] 특히 드라이브를 하다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여자|여인]]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게 바로 과장되게 탕아처럼 행동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으며 그의 행적을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 이전에는 [[자전거]] 광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소속의 윤덕한[* [[김완섭]]에게 사랑받는 [[학자]]이니 알아서 잘 판단하자.]에 의하면 방탕한 생활 덕에 [[이토 히로부미]]에게 여러 차례 잔소리와 꾸지람을 당했다고 한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건 탈출 사건으로부터 10년이나 이전이다. 확실히 당시에는 미국에서 [[사랑]]에 빠져 "[[에드워드 8세|이 여인을 위해서라면 황적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윗사람들 뒷목 잡게 하는 행동을 했었다. 그래서 윤덕한은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려고 한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사실 윤덕한 뿐만 아니라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부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의친왕의 행적도 같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의친왕의 염세주의적, 즉흥적인 성정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그럴 만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같은 저서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하자 [[순종(대한제국)|순종]]은 [[통감부]]로 가서 그를 조문한 뒤 의친왕을 [[도쿄 도|도쿄]]로 보내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참가토록 했으나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거절했다고도 한다. * 5녀인 [[이해경]] 여사가 [[1997년]]에 수기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펴낸 바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의 [[사동궁]](의친왕의 본가) 생활 및 황실 상황에 대해 회고하고, 저자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 동양학 사서로 일하면서 발견한 의친왕 관련 각종 기록(항일운동 관련 기록)도 소개하고 있는데 현재는 절판되었다. [[이해경]] 여사가 [[2017년]] 출간한 《마지막 황실의 추억》[* 2023년에 개정판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이 출간되었다.]에서는 저자 일신상의 이야기가 많이 실리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위의 수기와 겹치는 내용이 많다. [[1930년]]생인 저자가 얼마 안 남은 삶을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위의 수기도 희귀본이 되는 등 의친왕에 대한 자료가 워낙 적은 탓에 다시 [[책]]을 펴냈다고 한다. 개인의 수기라고는 해도 의친왕이 항일운동에 관여한 자료 부분은 출처까지 밝혀가며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상당히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개인의 회고록 외에) 의친왕 관련 연구로는 [[신복룡]] 前 건국대 석좌교수의 저서 <대동단 실기>가 있다. 상기한 [[1919년]] 11월의 상해임정 망명시도 사건 전반을 다루고 있다. 여담의 여담으로 신복룡 교수는 의친왕 망명을 주도한 대동단 단원 최익환의 사위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