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천 (문단 편집) == 평가 == 의천의 업적 자체는 상당히 진취적이었지만 모든 것들이 면밀한 검토없이 왕자라는 신분 하나에만 의존하여 시행한 탓에 결과적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의도야 좋았지만 실천 방법은 오로지 신분빨로 밀어붙인 일방통행, 장기적인 대책이 없이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밀어붙였을 뿐이었다. 온갖 것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겠답시고 보자기로 감싼 것도 아니고 튼튼히 못질을 한 것도 아니라 자기 두 손의 힘으로 뭉쳐서 쥐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러니 의천이 없어지자 의천이 뭉쳐놓았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진 것이다. 우선 [[한국사]] 최초로 [[불교]] 교단 통합을 이루었지만 통합을 지시한 의천이 왕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승려]]들이 어쩔 수 없이 권력에 눌려서 합쳐진 것이라 의천 사후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불교의 분열은 단순히 몸이 멀어지니 마음이 멀어져서 분열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멀어져서 몸이 분열된 것이다. 의천은 근본적인 문제인 사상적 차이를 등한시한채 그저 몸만 억지로 결합시키기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이 문제는 한참 뒤 [[지눌]]이 사상적인 통합이라는 교단 분열의 진짜 원인인 사상적 차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겨우 해소될 수 있었다. [[화폐]] 사용 건의도 마찬가지로 [[경제학]]에 무지한채 단지 [[송나라]]에서 자기가 써보니까 편하고 좋다는 이유만으로 건의한 것이라 제대로 된 화폐 유통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화폐를 도입하려면 정부 자신을 포함해서 사회 많은 곳에서 체제를 철저히 뜯어고치는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도입을 포기하고 내버려두어야 했다. 그런데 무턱대고 주전도감을 세워 화폐를 찍고 보기만 했으니 실제로 사용해야 할 일반 백성들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고려 [[성종(고려)|성종]]의 [[건원중보]][* 사료에서 발행과 유통이 확인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이다. 철전으로, 이름은 [[당나라]] 화폐에서 따왔다.], 조선 [[숙종(조선)|숙종]]의 [[상평통보]]에게 밀려 의천의 화폐들은 가짓수는 가장 많지만 인지도가 한없이 떨어진다.[* 물론 화폐 사용 건의 문제는 의천만의 문제점은 아니긴 하다. 후대의 조선에서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인조 등이 대체적으로 무작정 화폐를 찍어내면 장땡이겠지 하고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그나마 인조 시기에는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이것도 두차례의 호란으로 말아먹었다.] 화폐경제가 어느정도 자리잡은 조선 말기에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이라는 대삽질을 하기도 했고 서양의 경우도 프랑스에서 [[미시시피 거품]]이 터진 것에는 지나친 화폐 발행도 있었다. 거기다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이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 기초조차 없었다. 이 당시만 해도 경제 분야는 그저 국부를 증강시키기 위한 비법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 시대가 농본주의적인 시기라 상업을 통한 국부증강 등은 생소했고 상업 자체도 천시되던 시대였다. 의천을 마냥 비판하기에는 시대적인 문제도 있다.] 다만 의천이 행한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교단 분열은 확실히 나라의 사상적 기반을 흔드는 좋지 못한 현상이니 통합은 불가피했고 화폐 도입 또한 궁극적으로는 백성과 나라의 편의성 도모에 필수적인 행위였다. 더불어 의천 본인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해외 유학을 다녀옴으로써 스스로 국내에서 정치적인 기반을 쌓을 방법을 원천차단하여[* 송나라로 불법 유학을 다녀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만의 하나 의천이 국왕이 되었더라면 이 경력이 문제시되어 국제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의천을 간 크게 차기 국왕으로 밀어주려 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형의 왕권 강화에 보탬이 되었다는 좋은 작용도 있었다.[* 왕의 형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왕권의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 만약 의천이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 계속 왕자로만 남아 교단 통합이나 화폐 도입을 주도하려 했었다면 [[숙종(고려)|숙종]] 입장에서는 마냥 곱게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의천이 스스로 왕위와 거리를 둔 덕에 숙종 또한 의천을 잠재적인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 순수하게 형제로서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숙종이 의천의 건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주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하며 의천을 추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의천이 송나라 유학 시절 여러 송나라의 [[경전]]들을 모아둔 것이 나중에 송나라에서 유실된 경전 복원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의도치 않게 [[중국]]의 불교사 보존에도 공헌을 한 셈이다. 종합하자면 그야말로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아주 착한 왕자님이 선량한 의도만으로 이것저것 하기는 했는데 너무 착한 나머지 반대파나 불안 요소들을 확실히 정리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추진한 탓에 뚜렷한 업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라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체는 명확하게 파악했고 이 때 의천이 남겨놓은 [[가이드라인]]들이 후대의 지표 정도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의천이 국왕이 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는데 만약 의천이 국왕이 되어서 교단 통합이나 화폐 도입 등 위의 정책들을 국왕의 권위로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들었더라면 고려의 혼란이 더 일찍 터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리더가 성질이 더러워도 능력이 뛰어나면 조직이 그런대로 굴러가는데 성질이 착해도 능력이 미진하면 신하들에게 휘둘리거나 심각한 실책을 저질러서 나라 말아먹기 딱 좋은데 의천이 그런 케이스였다. 다행히 의천에게는 [[선종(고려)|선종]], [[숙종(고려)|숙종]]처럼 능력이 뛰어난 형들이 있었고[* 잘 언급되지 않아서 그렇지 선종 역시 부왕 [[문종(고려)|문종]]이 이룩한 황금기를 유지시킨 명군이었고 숙종 역시 쿠데타와 비슷하게 정권을 잡았기는 했지만 능력이 출중하여 제법 업적을 남긴 케이스였다.] 형들이 의천을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활동을 용인해주었기에 의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사회 혼란이 별로 없을 수 있었다. 의천의 송나라 유학에 대해서 송 - 고려가 단교한 상황에서 왕자가 함부로 송으로 가서 대요 관계를 망칠 뻔 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말도 있지만, 이는 고려 - 요 관계에 무지한 소리다. 당시 고려는 [[요나라]] 때문에 공식적으로 송나라와 단교를 선언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여요 전쟁 이후에도 잘만 송과 교류했다. 송 왕조 입장에서는 수교하여 교류한지 한참된 나라의 왕자가 방문한 것이었으며, 이 사실이 요 왕조에게 알려진다고 해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 일은 전혀 없었다. 고려인과 한인들은 의천이 '멋대로' 송으로 갔다고 두려워할 일도 없었고 송 조정은 의천을 쫓아낼 이유도, 껄끄러워할 이유도, 받아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의천 본인 또한 왕자의 신분을 버리거나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이는 여요 전쟁으로 고려가 송과 단교했다는 잘못된 낭설이 만들어낸 조잡한 비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