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자왕/생애 (문단 편집) === 삼천 [[궁녀]] 설화 === || [[파일:external/www.newscj.com/214040_166629_2731.jpg|width=100%]]|| ||[[파일:고란사삼천궁녀.jpg|width=100%]]|| || 삼천 [[궁녀]]가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낙화암]][* 이름부터가 떨어질 낙(落), [[꽃]] 화(花), [[바위]] 암(岩). "꽃이 떨어진 바위"다.], 부여 고란사 벽화 || 흔히 의자왕 하면 '삼천 [[궁녀]]'를 떠올리지만, 삼천 궁녀는 진짜 정확히 궁녀 3천 명이 아니라 궁녀를 많이 거느렸다는 문학적인 수사[* 고전 한문학의 '삼천'은 [[불교]]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서 나온 개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은 3천이 아니라 1천의 3제곱, 즉 10억을 뜻한다. 원전 의미를 곧이곧대로 대입하면 3천 명이 아니라 10억 명이 죽었다는 소리가 된다.]에 불과하다. 삼천 궁녀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도 조선 초기에 와서이다. 《[[삼국사기]]》에는 [[낙화암]][* '낙화암'이란 이름도 이 전승이 얽혀서 덩달아 유명해졌다. 전국의 물가 절벽을 가진 지역 명승지 중에 이 이름을 가진 곳이 몇 군데 있다.]에 대해 아예 언급이 없고 《[[삼국유사]]》에서도 단지 '의자왕과 후궁들이 바위에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의자왕은 중국에서 죽었으므로 이 이야기는 잘못됐다.'고 [[일연]]이 언급한 데서 등장할 뿐이다. 조선 시대의 문인들이 낙화암과 [[백제]]를 소재로 한 글을 쓰면서 '백제가 멸망하면서 삼천 궁녀들이 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구나'와 같은 표현을 남기곤 했다. 정리하자면 '삼천'은 그냥 많은 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런 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로 [[성경]]의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했다는 이야기이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물과 식량을 40일간 끊으면 [[아사|굶어 죽는다.]] 이는 현대로 올수록 단위가 커진다. 원시 부족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으면 많다가 되기도 했고,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로 수천, 수백만이란 표현은 실제로 천에서 만, 백만에서 천만 사이의 어떤 구체적인 수가 아니라 많다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비슷한 사례로 [[측천무후]]를 까는 기록에서도 측천무후가 색을 밝혀 남첩이 '삼천'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시 실제로 남첩 3천 명을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남첩이 매우 많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측천무후를 까는 용도라 신빙성은 별로 없는 기록이다. 후대의 사관들이 '나라가 망하니 많은 왕실의 여인들이 아마도 여기서 죽었겠지.'라고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문학적 수사를 진짜 수치로 오해한 결과로 의자왕은 오늘날까지 색욕의 화신으로 낙인 찍혔으니, 언어의 관습이 변하며 만들어진 의도치 않은 역사왜곡이 된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삼국사기]]》에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했다는 기사가 있다. 좌평으로 임명할 만큼 장성한 아들이 41명이나 있었다면 실제로 색욕 쪽으로 충분히 발달했을 수도? 다만 이 경우엔 양자나 친족 등 부여씨 왕족을 비롯해 군주의 친위 세력의 인사들을 중용한 것을 표현했다는 해석도 있다. 정말로 친아들 41명이었다면, 아들과 딸이 비슷한 비율로 태어난다고 볼 때 자식 숫자는 거의 80명에 달하고, 모든 아들을 좌평으로 임명했다는 보장도 없는 만큼 100명도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중산정왕]] 유승[* 《[[삼국지]]》의 주인공격으로 유명한 촉한 소열제 [[유비]]의 조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다.]처럼 자식이 120명이 넘어가는 사람들도 역사 속에는 있으니 의자왕이 자식을 80-100명쯤 두었다고 해도 불가능하지야 않지만... 참고로 궁녀 1만을 두었기로 유명한 서진 무제 [[사마염]]의 자녀는 고작(?) 25명이었다. [[백제]] 말기의 수도 [[사비성]]의 인구가 대략 5만 명 내외[* 《[[주서]]》 <백제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비에 약 1만 호가 있었다. 한 호에 5명이라 치면 5만 명 남짓이고, 고대는 대가족이라 평균 10명이라 가정하면 10만 명쯤 된다.]로 추정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반도의 고대 국가에서 한 도시에 비노동 인구 3천 명을 먹어살릴 능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5만 명 중 여자는 절반 정도였을 테니, 어린이와 노인 등을 제외하고 [[궁녀]]로 재직할 수 있는 나이 적당하고 건강한 여자는 1만 5천 명 정도였으리라 추정한다. 삼천궁녀설이 사실이라면, 한 도시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을 나이 여자 중 20%가 궁녀인데 그렇게 해서 인구가 유지되거나 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고려]] 왕조의 막장 임금 [[충혜왕]]이 전국의 미녀란 미녀를 다 긁어 모아서 100명이 넘는 궁녀를 채웠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왕조에서도 [[연산군]]이 미녀를 긁어 모아서 궁녀가 1천 명을 살짝 넘는 수준이었다. 그 이외에도 조선 왕조는 궁녀의 숫자를 600명 정도로 유지했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보다도 인구가 더 적었던 백제가 이렇게 많은 궁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그보다 알려진 지식으로는 백제 궁터가 궁녀 3천 명을 수용하고도 돌아갈 만큼 넓지도 않다. 삼천 궁녀 설화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엉뚱하게도 일제의 [[식민사관]][* 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국제적인 정세에서 보지 않고 군주 개인의 타락에 귀속시켰다는 점에서] 탓으로 돌리는 경향도 있다.[* 당장 위에 '의자왕'이라는 왕호를 두고 의롭고 자애로운 운운했던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역사채널e에서도 의자왕이 폄하된 것은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내보냈다.] 하지만 백제의 멸망 원인을 군주 개인의 부도덕에 귀속시키는 점은 당대의 《[[일본서기]]》부터 [[조선시대]] 각종 문인(황엄, 김흔, 조위 등)들의 평가까지 거의 일관된다. 나라의 멸망을 군주 개인의 부덕이라고 탓함이 과연 식민사관일까? 보통 식민사관으로 지목되는 각종 학설[* 조선시대 붕당 망국론, 반도의 지정학적 약점, 유교 망국론 등.]을 보면 개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 내부에 근본적인 모순점이 있어 애당초 극복할 수 없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인의 평가 중에는 '백제의 기운은 이미 쇠했으며 그 결정체가 의자왕이라는 암군'이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도다. 이런 견해는 백제의 운명이 이미 빼도박도 못하게 멸망할 예정이라고 보았다. 의자왕의 책임은 덜어지겠지만 [[백제]]는 구제불능 국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일반 대중의 머릿속에 '삼천 궁녀는 사실'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진 것은 국정 교과서와 대중매체에서 이것을 제대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중의 역사 상식과 실제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유일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각종 드라마, 소설, 상식(?) 등을 통해서 [[태종(당)|당태종]]의 공격을 방어한 고구려의 장수는 [[안시성주|양만춘]]이라고 많이들 알지만 정사에는 [[안시성주|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며 그냥 [[안시성주]]라고만 언급될 뿐이다. 또다른 예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철쇄를 사용하여 왜군을 격퇴했다는 대중의 상식(?)에 비해 그 역사적 근거는 매우 빈약하며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나... 중국어에서도 삼천 궁녀 비슷한 표현이 관용수사로 나온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서 '후궁가려삼천인'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역시도 과장된 문학적 수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다만 [[중국]] [[서진]]의 무제 [[사마염]]의 궁녀 1만 명은 실제 《[[진서]]》에 기록되었다. 이 쪽은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고, 서진은 중국 대륙 북방을 통일한 위나라를 바로 이은 나라이기에 충분히 가능하다.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도 궁녀 1만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였고 그 결과 서진은 오래 못가 멸망하고, 중원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맞는다. 사실 말도 안되는 묘사인 만큼, 역사를 진지하게 다루는 창작물에서는 이 삼천궁녀 자체를 묘사하지 않거나 아예 다른 방식으로 각색하곤 한다. 김정산의 역사소설 《[[삼한지]]》에서는 의자왕의 삼천궁녀설이 김유신의 책략이라는 내용으로 서술된다. [[무왕]]이 <서동요>를 통하여 [[선화공주]]를 데려간 것을 차용하여, 의자왕이 궁녀 1,000 명을 거느린다는 소문을 퍼뜨려 백제의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계획이다. 작품 내에서 이 계획은 실로 훌륭히 성공하여 1,000 명으로 시작된 소문이 종국에는 3,000 궁녀를 거느린다는 소문으로 부풀려졌고, 백제 내 민심에 큰 혼란이 생겨 백제의 국력에 타격을 입혔다.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도 삼천궁녀 의자왕이라는 가사가 있다. [[합판소문]]으로 악명높은 [[연개소문(드라마)]]에서는 최후반부인 백제멸망파트에 [[발 CG]]로 구현되었다. 그런데 그 연출 수준이 처참하기 그지 없어서, 발 CG와 병맛 연출이 넘치는 드라마 상에서도 네타장면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삼천궁녀는 단순히 CG만 구린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문제가 많은 장면이다. 일단 연출 의도 자체가 특정 역사(백제, 의자왕, 그리고 신라)를 비하하고 비난하기 위함이다. 작중 백제는 의자왕이 암군으로 전락하면서(의자왕의 암군적인 면모 역시 작중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구제 불능 수준으로 망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신라는 그런 한심한 파탄 국가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더욱 한심한 수준이었기에, 결국 외세의 힘을 빌려 백제를 공격한다. 이런 역사 인식은 소정방이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비난하는 장면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또한 서사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많은데, 이 장면은 의자왕이 다급히 웅진으로 피난가기로 결정한 직후에 등장한다. 그 많은 궁녀들이 현실에 절망한 끝에 집단 자결을 결심하는 묘사 같은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고, 그냥 아무 맥락도 없이 궁녀들이 집단 자살을 하는 식으로 묘사된다. [[봉숭아 학당]]에서 [[맹구]]가 삼천궁녀 이야기를 하는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 번째 궁녀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풍덩!', '두 번째 궁녀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풍덩!' 이렇게 개그를 하다가 다섯 번째쯤 되니깐 선생님이 그만하라고 말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