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읍성 (문단 편집) == [[도시]]와 읍성의 차이점 == 전근대까지 서양에서 기원한 도시와 읍성의 차이점은 확실히 명확한 편이다. 우선 형성 과정부터가 약간은 차이가 났다. 도시의 경우 두가지 경우로 나눠졌다. 하나는 [[고대 로마]] 시대때부터 계획적으로 설계되거나 아니면 자연적으로 마을의 인구수가 증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읍성의 경우 그나마 전자와 같은 예이지만 기능 면이서 크게 차이가 났다. 우선 도시의 경우 주로 상·공업이 발달하거나 아니면 해당 기능이 우선적이었던 반면에 읍성의 경우 본래 행정적인 기능만 고려된 채로 조성된 것들이 대부분으로 조선 중·후기가 되면서 상업이 발달하면서 추가적으로 상업적 기능이 추가된 것에 불과하지만 [[상평통보]] 항목을 참고하면 동시기 [[화폐]] 사용이 보편화된 서양과는 달리 화폐의 보편화율이 25%에 미치지 못했다. [[광장]]의 유무에도 차이가 있었다. 광장은 멕시코 만류와 지중해의 영향을 크게 받는 유럽의 기후적 특성과 함께 전근대까지 [[건폐율]]과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의 특징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 등으로 인해 생긴 산물로 고대 그리스 때부터 [[아고라]]라는 이름으로 광장이 존재했으며,옛부터 정치·학문적 토론의 장이자 [[재래시장]]과 같은 경제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중세에 들어서는 그저 경제적 기능이나 아니면 참수된 죄인의 목을 효수하거나 화형장으로서의 기능만 남아 있었지만 대신 도시의 지배층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성당]] 및 [[교회]]와 그리고 [[시청(행정)|시청]]이나 [[마을회관]], 길드홀과 같은 공공 건물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다만 조선의 읍성을 비롯한 동양권의 경우 이러한 광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서양과는 정반대의 경우로서 서양과 달리 뚜렷한 사계절 및 고온다습한 여름을 가진 기후적 특징과 함께[* 비교적 해양성 기후의 특징이 강한 일본조차 광장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한국 한정으로 낮은 인구 밀도가 주요인이었고,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상업보다는 농업을 중시되었으며, 상류층을 제외하면 정치적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또한 밑에 후술되어 있지만 다층의 여러 개의 건물들이 벽을 맞대어서 폐쇄적인 유럽의 도시와 달리 조선의 읍성 내의 건물들은 관청과 같은 공공건물이나 주택가 전부가 대개 조선 중기때까지는 중·상류층 한정으로 2층 가옥이 있으나 조선 후기 [[온돌]]의 보편화로 대개 단층에 낮은 담장으로 구분되어있었고, 또한 마당의 규모가 건물에 비해 상당히 커 개방감이 있어 사실상 광장의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 경재적 기능은 위에서 상술하다시피 조선 중기서부터 점차 사상(私商)이 점차 생기기 시작했고, 대개 객사 내의 마당이나 주막 주변에서 5일장이 열렸다.[* 여담이지만 많은 수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던 수도인 한성의 경우 아예 불법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가가(假家)를 만들어 거기서 상업 활동을 이루어졌는데, 지나치게 많아졌던 탓에 한성부 내의 도로가 극악으로 좁혀지면서 1896년 도시개조사업을 하기 전까지 대로가 아닌 이상 여러 사람이 함께 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위치에서도 차이가 있다. 둘다 강을 끼고 있는 것은 동일했지만 서양의 경우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야에 도시가 조성되는 것이 보편적이었고, 몇몇 도시의 경우 아예 강이 없거나 언덕 위에 조성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읍성의 경우 주로 한반도의 지형상 산지가 많았기에 지척에 산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풍수지리]]의 [[배산임수]]에 입각한 위치 선정으로 인해 대체로 북쪽으로 산이 남쪽으로 강이 끼고 있으며, 심지어 [[대구읍성]]처럼 [[분지]] 지형에 읍성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기 때문이다.[*주의1 보편적 인식이 그렇지 실제로 새벽에 발생하는 기온 역전 현상으로 대기가 순환하지 않기 때문에, 공기가 좋은 곳이 아니라면 아침에 운동을 하면 좋지 않다. 사방에서 바람이 산을 타고 푄 현상을 일으키는 탓에 여름이 되면 매우 덥다. 물론 철원군의 예처럼 겨울이 되면 매우 춥다. 춘천시처럼 여름엔 엄청나게 덥고 겨울엔 엄청나게 춥다. 특히 대구의 경우 구름이 산을 통과하지 못하고 빗겨가거나 분지 지형 특성상 대류가 어려워 구름이 발생하기 어렵기 때문에 강수량도 상대적으로 적을뿐더러 [[대프리카]]라는 별명답게 춘천시처럼 여름에 엄청나게 덥기로 유명하다.] 반면 유럽의 경우 국가·지형별로 도시의 위치가 제각각이었다. 우선 유럽은 상기했듯 기후적으로 [[난류]]의 영향을 받기에 위치가 어떻게 되던 계절에 따른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한 절대 다수의 나라들이 [[기독교]] 문명에 편입되었기에 땅의 위치를 따지는 것도 미신으로 배척했다. 그래서 배산임수의 지형임에도 알프스 산맥 이북의 도시들처럼 남쪽으로 산이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로마와 [[부다페스트]]처럼 언덕 위에 도시가 조성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근접하는 [[하천]]의 경우에도 차이가 있는데 서구권의 하천의 경우 대체로 강의 중·하류 지역이 여럿 척의 나룻배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으며 무엇보다 초기엔 강과 접하고 있다가 도시가 확장되면서 도시의 영역이 강의 반대편까지 확장되었고, 이때문에 수운에서도 나룻배가 도시 안에 정박할 수 있어 도시 내의 나루터의 기능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전쟁이 빈번했던 유럽 지역의 정치적 요인으로 여러 기능이 분산된 것보다는 한곳으로 집약되는 현상이다. [[https://www.deviantart.com/djahal/art/2016-Matte-Painting-Film-Notre-Dame-734785429|중세 중기 파리 복원도]]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c/Braun_Messina_UBHD.jpg|16세기 메시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4/Eigentliche_Abbildung_des_H._R%C3%B6mischen_Reichs_freyer_Statt_C%C3%B6llen_%28Plan_1633%29.jpg| 17세기 쾰른]] 이는 [[일본]]의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럽처럼 강의 중하류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다름아닌 '''[[도쿄도|에도]]'''이다. 반면 읍성의 경우 대개 여름철 폭우로 인해 하천의 범람을 우려해 대개 강가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편으로 나루터나 포구의 위치가 읍성과 멀리 떨어진 편인데다가 읍성 내에 하천이 있더라도 대개 실개천인 경우가 허다했고, 수문으로 인해 막혀 있었다. 이는 해안에 위치한 현대의 항구에 해당되는 포구 또한 마찬가지로 포구와 읍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예로 [[부산]]를 들자면 원래 조선시대에 [[동래구]]가 중심지였으며 부산이란 지명은 본래 진성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후 부산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지금과 같은 지명의 위치가 역전이 된 것이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30263&categoryId=49274&cid=49274|강가형]][[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30264&categoryId=49274&cid=49274|읍성형1]][[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30265&categoryId=49274&cid=49274|읍성형2]][[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30266&categoryId=49274&cid=49274|해안형]] 또한 도시 주거에서도 상대적으로 차이가 났다. 전근대 이전까지의 서양의 도시의 주거들은 대체로 비좁은 방어벽의 넓이로 인해 건축 부지가 상대적으로 넓지 않는 대신 토지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다층과 비좁은 도시 내의 면적과 동양과 다른 해앙성 기후 등으로 덕에 건폐율이 높은 맞벽(party wall) 구조가 기본이었다.[* 이는 일본의 성 아래 마을의 [[https://ja.wikipedia.org/wiki/%E7%94%BA%E5%B1%8B_(%E5%95%86%E5%AE%B6)|마찌야]](町家)와 중국의 [[https://zh.wikipedia.org/wiki/%E5%9B%9B%E5%90%88%E9%99%A2|사합원]]과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0/Daozuofang_in_Mao_Dun_Guju%2C_Beijing.jpg|倒座房]],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5/Fenghuang_old_town.JPG|묘족의 마을 가옥]], 등 전통 주거가 남아 있는 구도심 역시 대체로 맞벽으로 되어 있다.] 고대 로마에서 [[아파트]]의 시초인 [[인술라]]와 귀족들의 저택인 도무스가 있었고, 중·근세의 서·남유럽에선 주로 폭이 좁은 세장형 주택들이 보편적이었고, 파리의 경우 14세기 중반부터 상류층을 위한 도시 환경에 맞는 다양한 구조의 [[저택]]이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또한 도무스를 본뜬 사각형의 중정이 있는 저택인 팔라초를 짓기 시작했다.[[https://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0429734173754.pdf|이탈리아 피렌체의 서민주거지역의 형성과 주거형식의 변화]][[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gowoon914&logNo=220673925336|이탈리아, 르네상스건축의 특징 팔라초의 발전]][[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44537|르네상스 시대의 팔라초(palazzo)의 공간 구성 특성에 관한 연구]][[https://publishing.cdlib.org/ucpressebooks/view?docId=ft0x0n99zf;chunk.id=0;doc.view=print|르네상스 이후 파리 주거의 변화]][[https://fr.wikipedia.org/wiki/H%C3%B4tel_particulier|위키피디아 호텔]][*영어, 불어 주의] 하지만 읍성의 경우 대체로 [[한옥|단층 건물]]이 주류로 가사규제 등으로 인해 계층별로 차이가 있지만 건축부지가 건물 면적에 비해 넓은 것이 특징으로 근·현대 이전의 서구의 도시 주거와 달리 담장으로만 구별이 되어 건폐율이 낮은 것이 특징으로 대체로 읍성 밖의 주거 건축과 대동소이했다. 이는 겨울이 건조한 특성상 화재가 옆집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효과를 노린 것도 있다.[* 실제로 유럽이나 일본의 대도시에서 대형화재가 생기면 도시 전체로 번져 말 그대로 '대화재'(Great Fire)가 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조선에는 그런 게 거의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유럽과 일본의 경우 방화 및 화재에 대해 무대책인 것은 아니었다. 화재를 예방 및 방화범에 대한 처벌에 대한 법률 제정과 각종 소방 장비 그리고 점차 [[팀버프레임|목조 건물]]에서 벽돌 건물을 세우면서 도시 내의 화재를 예방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https://blog.naver.com/yoons_cha/40115467134|링크]]] 그나마 조선 중기까지 [[한국 건축#S-2.1.4|2층 건물]]이 있었지만 대개 가난한 평민들은 단층 가옥이 보통이었고, 무엇보다 보통 무더운 여름철에만 2층에 거했으며, 가사규제령 등으로 인해 시대가 흐르면서 2층의 높이가 낮아지기 시작해 나중에 일종의 수납 공간인 다락으로만 남게 되었고, [[경신대기근]]을 동반한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인해 [[온돌]]이 전 계층으로 보편화됨에 따라 조선 후기의 가옥들은 거의 단층으로 전환되었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96471&categoryId=49267&cid=49267|고려시대 상류층의 주거 공간]][* 링크에 고려시대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 넓게 보면 조선 중기까지 포함된다.][[https://blog.daum.net/deogsul/2245540|#]]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맞벽구조는 화재에 취약하고 단열성이 떨어진다 하여 아예 법으로 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17세기 이후부터 도성인 한성부를 제외한 사회적으로 최상위층이었던 사족 집단들이 동일한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읍성 밖에서 [[집성촌]]을 형성되었는데, [[향리|향리직]]을 세습하는 지방의 중인층 이하의 계층들만 읍성에서 살았으며, 조선초 세종 시기에 반포된 가사규제령으로 인해 집의 크기와 구조 및 장식 등을 규제로 인해 중인을 비롯한 일반 양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할지라도 정해진 규격 외의 집만 지을 수 있었고, 그나마 사회·문화적으로 문란해진 조선말에 읍성 내에 대형 저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https://younghwan12.tistory.com/3101|#]] 때문에 인구밀도와 [[도시화]]율에서도 크게 차이가 보이는데, 일례로 중세 당시의 도시들은 대체로 동양과 비교하면 도시 내의 면적이 비좁은 대신 인구 밀도가 높아 대도시는 3㎥(300만㎥)~6㎦(600만㎥), 중소도시 0.2㎦(20만㎥) 이내, 주거지역 한구당 1인당 13.5~20㎡, 비주거지역은 평균 210제곱미터였다. 인구 수는 적게는 천명 수준이지만 [[파리(프랑스)|파리]] 같은 대도시의 경우 약 10만명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근세로 넘어가면서 인구 수가 크게 증가해 1600년대 220,000명이 되었고, 동시기의 [[런던]] 또한 이에 근접한 인구수를 자랑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 또한 이에 못미쳤지만 인구수가 140,000명이었고, 19세기로 진입하면서 대도시의 인구수는 100만이 되가기 시작했다. 그외의 지방 도시의 경우에도 중·근세를 거쳐 보통 도시 인구수가 수만명이 보통으로 당대 기준으로 중남미와 중동쪽을 포함하면 그나마 도시화율이 높은 편이었다. 더욱이 중세를 기점으로 도시와 농촌이 행정적·정서적으로 분리되었기에 비교적 도시와 농촌의 인구를 분리해서 조사하기 쉬웠다. 반면 읍성의 경우 내부 면적이 넉넉했지만 반대로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읍성의 면적은 적게는 60,000㎥에서 크게는 150,000㎥로 읍성 중 가장 작은 곳이 2만㎥인 진해읍성이며, 가장 넓은 곳이 내성 한정으로 8.5㎦인 [[개성시|개성]], 북성+내성 기준으로 4.3㎦인 [[평양성|평양]], 1.29㎦인 [[수원 화성]] 등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읍성 내에 살던 인구수를 자세히 아는 것은 불가능 한데, 이는 [[조선#s-18|조선의 인구 조사]]가 국가가 직접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아닌 해당 고을의 주민들이 알아서 신고하는 구조였기에 세금을 피하려고 호구 조사에 일부러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실제로 조선 조정의 영향하의 동원 가능한 인구 수는 세종 시기에는 열의 한둘 정도라고 세종지리지에서 스스로 인정한 바가 있었다. 더욱이 서구권과 달리 도시와 농촌이 행정적으로 분리되지 않던 조선은 인구수를 연구하려는 학자들 입장에서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힘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읍성에 살던 인구수는 추정에만 근거할 수 밖에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농촌부의 인구수를 합한다고 해도 당대의 유럽의 도시와 비교할 때 도시화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edeah.d_0004_0030_0030_0020&setId=236312&position=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