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읍성 (문단 편집) == 상세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056|상세 내용]], [[http://contents2.kocw.or.kr/KOCW/document/2016/cu/ahngyebog1/7-1.pdf|간략 소개]] [[산성]](山城)과 함께 한국 성곽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의 중심이 되는 중앙 고을에 위치하여 내부에는 관아와 [[병영]]을 비롯한 지방 관아와 [[향교]], 장터 등이 있어 행정, 군사, 교육, 상업 중심지였다. 읍성은 대규모 전란에는 방어능력이 다소 떨어져 가까운 곳에 산성을 추가로 건설해 두는게 일반적이었다.[* 고구려 [[국내성]]과 [[환도성]], [[평양성]]과 [[대성산성]], 백제 [[위례성|한성]], [[부여성]], 신라 [[서라벌]]과 [[명활산성]], 조선 [[한양]]과 남한산성 등 역대 왕조의 수도들도 평지에는 도성, 주변 산에는 산성을 지어 2~3성의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읍성들은 멀게는 삼국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여러 왕조를 거쳐 보수하거나 신축되어 조선 시대에는 [[부(행정구역)|부]]와 [[목(행정구역)|목]] 대부분, [[군(행정구역)/대한민국|군]]과 [[현(행정구역)|현]] 중에 북방에 위치해 여진족을 방어해야 하거나 해안에 접해 왜구를 방어해야 하는 고을에 있었고, 내륙 지역의 군현에는 읍성이 없어[[http://panzercho.egloos.com/m/category/%EC%9D%8D%EC%B9%98|#]] 전국적으로 300여개의 읍성이 있었다. 다만 읍성이라는 용어는 조선 때부터 등장한다. 구조적으로는 [[한양도성]]도 읍성과 유사하나, 왕의 치소가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도성(都城)이라고 구분지어 부른다. [[일제강점기]] 동안 읍성철거령에 의해 대부분의 성이 철거됐으나, [[경주읍성]], 영천읍성[* 서측 성벽 일부가 그 위에 지어진 낡은 주택들의 축대로 쓰이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남은 남측 성벽 역시 일대 건물들의 축대로 쓰이고 있다. 동측 성벽은 아예 남아있지 않으나, 그 터에 시멘트로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교회를 지은 덕분에 성벽의 흔적이 조금 보인다. 북서측은 시에서 시립체육관을 지으며 땅을 팔때 성벽 구간만 거의 파지 않은 덕분에, 노출된 암반들로 그 위치를 가늠할수 있다.] 등 일부 성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지방자치제]]의 전면시행 이후 각 지자체마다 지역의 관광자원 개발과 지역 정체성 확보를 위해 읍성을 복원하는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