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미사변 (문단 편집) == 일본 사회의 인식 == 과거 많은 일본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이 같은 인식은 일본인 중장년층의 여러 증언으로 알 수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교과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도 정확히 공부해야 한다.”(가이 토시오 전 일본 중학교 교사) [[https://www.google.co.kr/amp/s/www.joongang.co.kr/amparticle/18817812|#]] 가이 토시오는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젊은 시절, 한 여학생이 [[명성황후]] 사건을 아느냐고 질문을 해 충격을 받았다”며 “일본인들도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퇴직 후 전직 교사 중심의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살해 가담자 48명 중 21명이 태어난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전·현직 교사들로 구성했다.[[https://www.sisamagazi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9703|#]] 110년 만에 후손들이 사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모임은 1대 협회장 가이 도시오가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조선인 제자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아시나요?'라는 질문을 계기로 일제의 만행을 파헤쳤고, 국가적인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는 기술되지 않은 것을 알고 경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이 끔찍한 역사를 알리고 한국에 사죄해야겠다"고 마음먹고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교사들과 설립한 것이었다. 게다가 을미사변에 가담한 범인들의 후손 약 20명을 찾아내고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 등을 발견한 후 경찰, 군인 등 주범의 정체를 밝혀냈다고 한다. 가와노 다쓰미는 2012년 유언으로 '대를 이어 참회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https://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736818|#]] >"일본 사람들은 과거를 진짜 모릅니다. 여성분들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남의 나라 [[황후]]를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 과거를 알게 되면 깊은 반성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수)[[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1203379|#]] [[호사카 유지]] 교수는 청년 시절 [[도쿄대학]] 금속공학과에서 재학 중 우연히 잡지에서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대해 알게 됐는데, 일본에서는 이런 내용을 전혀 교육하지 않아 무척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로 [[한국인]]들과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진게 계기가 되어 1988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했고 이후 [[귀화]]까지 했다고 밝혔다.[[https://m.ytn.co.kr/news_view.php?key=201908171150376321&s_mcd=0134#return|#]] [[https://books.google.co.jp/books?id=u5zSAgAAQBAJ&printsec=frontcover|#]] [[https://ko.m.wikipedia.org/wiki/%ED%98%B8%EC%82%AC%EC%B9%B4_%EC%9C%A0%EC%A7%80|#]] [[https://21sang.tistory.com/m/4108?category=557604|#]] 이 같이 많은 일본인들이 을미사변에 대해 몰랐던 것은 1948년 이래 일본 교과 과정에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9년 학습지도요령 개정으로 일본사는 필수 과목에서 선택 과목이 되기도 했다. 일본 사회에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이래로, 당시 쓰노다 후사코가 출판한 '민비암살' 이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전후로 사용된 교과서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언급이 없었으나 역사 바로 알리기 등의 운동이 벌어지며 2000년대 중반부터 일부 역사 교과서에서 기술되기 시작한다. >조선에서는 일본 공사 일당이 조선의 황후를 암살했으나, 친일 정권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朝鮮では、日本公使らが朝鮮の皇后を暗殺したが、日本よりの政権をつくることには失敗した。 >일본서적신사 '우리들의 중학 사회' (2005). 이후 을미사변은 대입시험문제에서 가끔 출제되며 [[http://nippon.nation.jp/Takeshima/ETC/BinhiNyuushi.htm|#]] 이를 강의하는 일본인 강사 중에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나 일본교과서의 서술과는 다르게 일본 정부가 을미사변을 주도한 것으로 인정하는 이들도 있다. [[https://youtu.be/ALYCWdk69rw|#]][* 이 강사는 '일본군([[미우라 고로]])에 의한 민비 살해'라고 칭하며 강사는 '민비를 중심으로 친러 정권이 성립했는데, 한국을 지배하려고 획책하는 일본에 있어서는 한국이 러시아에 접근하는 움직임이 유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네 이득을 위해 민비를 살해했고 민비는 이들에 의해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했다'고 언급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미우라 고로 둘을 을미사변의 주체로 보는 시각을 가진 강사도 있다.] 이를 봤을 때 대학을 가기 위해 출제범위 전반을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고교과정에서는 대부분의 역사교과서에서 을미사변을 기술하였다.[[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Article.do?cn=DIKO0011685266|#]] 그러나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을미사변의 기술은 삭제되거나 축소되기도 하였다. 2018년에는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8종 중 7종이 을미사변이 삭제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마나비샤[* 마나비샤는 진보 좌파 성향의 출판사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일본 교과서 중 가장 자세하게 기술했다가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으로부터 어느 나라 교과서냐고 공격받고 검정에서 수정을 강요받은 적이 있다. [[https://www.sankei.com/article/20150507-NUIHTJY5T5KM3EIXHE75KDKRHU/|이것은 대체 어느 나라의 교과서인가… 새 "마나비샤" 역사교과서, 검정 전 무시무시한 내용과 정체]]] 1종만이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http://m.hani.co.kr/arti/politics/diplomacy/843839.html#cb|#]] >1895年、日本公使らは、ロシア寄りの政策をすすめる朝鮮王妃を殺害した。日本に対する非難と反発は強く、日本の影響力は弱まった。 >1895년, '''일본 공사 일당'''은 친 러시아 정책을 추진하는 조선 왕비를 살해했다. 일본에 대한 비난과 반발은 강했고,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그동안 일본사는 선택과목이었으나 2022년 4월부터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세계사와 일본사를 합친 ‘역사총합’이라는 고등학교 필수 이수 과목이 신설되었다.[[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78|#]] 역사총합을 편찬한 총 12개의 출판사 중 7개 출판사가 명성황후 관련 서술을 하지 않았다. 서술한 출판사도 대부분 명성황후를 ‘민비’로 표기했고 명성황후라고 병기한 곳은 소수였다.[* 일본 고등학교 검정교과서 ‘역사총합’의 식민지기 한국 관련 기술 내용 검토-3・1운동과 관동대지진을 중심으로 (서종진)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4666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