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미사변 (문단 편집) == 황후에 대한 능욕 ==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 1905∼1977)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 1966년 9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을 발간했다. 그는 일한병합소사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이 책을 신학자 안병무가 번역하여 《한일합병사》로 1982년 한국에 출판되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 한일병합사(1982) 야마베 겐타로가 무엇을 보고 일한병합소사에서 사체능욕이라고 서술했는지 나오진 않지만 야마베 겐타로가 일본의 한국병합을 서술하면서 에이조 보고서를 언급하였기에 에이조 보고서를 토대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쓰노다 후사코는 1988년 1월 발간한 《민비암살(閔妃暗殺)》에서 '민비의 유체 곁에 있던 일본인들 중 나는 동포로서 도저히 글로 쓸 수 없는 행위를 한 것이 보고되었다.'고 서술하였다.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는 1992년《건건록의 세계『蹇蹇錄』の世界》에서 '사체를 능욕하고 불태워버렸다'고 서술하였다. 해당 자료인 에이조 보고서의 작성자는 공무원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이다. [[사이온지 긴모치|사이온지]][* 훗날 12대 일본 총리가 됨]의 지시를 받은 쓰에마쓰는 에이조에게[* 당시 서울에 거주 중이었고 을미사변에는 가담하지 않은 인물이다.]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게 하였고 에이조는 을미사변 다음날 이 보고서를 쓰에마쓰에게 보냈다. 이 '에이조 보고서' 에 국부검사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출처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https://ndlonline.ndl.go.jp/#!/detail/R300000001-I000001362364-00|憲政史編纂会収集文書目録 (憲政資料室所蔵目録 ; 第1)]]), 546번 조선왕비사건 관련 자료 (五四六、 朝鮮王妃事件関係資料) ] >四 実行者 > >コノ荒仕事ノ実行者ハ訓練隊ノ外守備隊ノ後援アリ。(後援ハ或ハ当ラザルガ如シ。) 尚守備隊ノ外ニ日本人二十名弱アリ。熊本県人多数ヲ占ム。(漢城新報社連)中ニ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モアリ 隨テ洋装和装相混ぜリ 岡本ハ大院君ト同時入城シ實行ノ任ニ當レリ 守備隊ノ将校兵卒ハ門警護ニ止マラズ門内ニ侵入セリ。殊ニ弥次馬連ハ深ク内部ニ入リ込ミ王妃ヲ引キ出シ二,三ヵ所刃傷ニ及ビ、且ツ裸体ニシテ局部検査(可笑又可怒)ヲ為シ最後ニ油ヲ注ギ焼失セル等誠ニ之レ筆ニスルニ忍ビザルナリ。ソノ他宮内大臣ハ頗ル残酷ナル方法ヲ以ツテ殺害シタリト言ウ。右ハ士官モ手伝イタリシモ王トシテ兵士外日本人ノ所以ニ係ルモノノ如シ。大凡三時間ヲ費ヤシテ右荒仕事ヲ了ラシタル後、右日本人ハ短銃又ハ刀剣ヲ手ニシ、徐徐トシテ光化門(王城正門)ヲ出テ群衆ノ中ヲ通リ抜ケタリ。時巳ニ八時過ニシテ王城前ノ広小路ハ人ヲ以ツテ充塞セリ。 > >이 사건의 실행자로는 훈련대 이외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다.(혹은 후원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 쯤 있었다. [[구마모토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며 (한성신보사와 연관된)그들 중 신문기자 몇명과 의사, 상인도 있었다. 그래서 양장, 화장([[기모노|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다. 수비대의 장교 및 병졸들은 궁궐 문의 경비병력의 제지에도 멈추지 않고 문 안쪽으로 침입하였다. '''특히 이들 무리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 두세군데 칼질을 하고(칼로 상처를 입히고 나서) 나체로 만들고 국부검사(우습고 화가 치민다)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든가 하는 참으로 이를 쓰기가 염려된다. 차마 쓰기 어렵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위는 사관도 돕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다. 대략 3시간 남짓을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서서히 [[광화문]](왕성 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나갔다. 그 때가 벌써 8시가 지났고 왕성 앞에는 사람으로 가득차 막혀있었다.[* 여담으로 1965년 12월 3일에 일본 정치인 쿠로야나기 아키라(공명당 소속)가 일본 참의원 '일한조약등특별위원회(日韓条約等特別委員会)' 에서 에이조 보고서의 이 구절 일부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https://kokkai.ndl.go.jp/simple/detail?minId=105014958X00919651203&spkNum=293|해당 기록]])] '''칼로 상처를 입힌 뒤 나체로 만들고 국부검사를 하고'''라고 되어 있다. 야마베 겐타로는 이를 두고 '사체능욕'이라고 하고 쓰노다 후사코는 '민비의 유체 곁에 있던 일본인들 중 나는 동포로서 도저히 글로 쓸 수 없는 행위를 한 것이 보고되었다.' 고 서술한 것이다. 이 표현을 두고 간음의 순화된 표현으로 본다면 살아 있었다면 [[강간]]으로도 볼 수 있고 죽었다면 [[시간(동음이의어)#屍姦|시간]]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에서 국부(局部)가 다리 사이의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데 기록된 것은 1936년 [[아베 사다 사건]]이 시초이며 을미사변 당시에는 현재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혹은 '국부검사'라는 것이 강간이나 시간까지는 아니고 간음하는 시늉을 했거나[*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최문형. 239쪽. '술에 취한 이들이 시신을 능욕하는 시늉까지 해가며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https://www.google.co.kr/amp/s/www.donga.com/news/amp/all/20060928/8356113/1|#]] ] 성기를 관찰하거나 만져서 능욕하였거나 임신 여부를 검사하였다는 해석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보든 간에 에이조 보고서에 따르면 추악한 짓거리를 벌였다는 말이 된다. 소설가 [[김진명]]은 야마베 겐타로의 책을 본 뒤 당시 일본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던 권용석 씨를 통해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던 에조보고서 전문을 입수하고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명성황후가 강간살해당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파일:에조보고서.jpg]]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077332|#]] 한편 서지학자 김종욱,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김진명의 강간 주장에 대해서 "상식에 위배되는 거짓 낭설"이라고 주장했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osskosa&logNo=40032094167|#]] [[https://m.blog.daum.net/soo3301/302656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