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미사변 (문단 편집) == 흥선대원군의 가담 == 명성황후 축출을 원했던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손을 잡았다. 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했다. 그는 별장 사랑에서 흥선대원군에게 자신들이 [[명성황후]] 일파를 축출해 주는 대신 "거사 후 대군주를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영선군|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 등 4가지 조건의 사실상 대원군의 정계은퇴를 강요하는 각서를 제시하고 자필 확인을 받아냈다.[* 흥선대원군 파벌이 적잖은 민중의 지지는 물론 군부와 경무청 등에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던 시점이라 일본 측은 민씨-친러파 일망타진 이후 대원군 일파가 또 다른 반대 세력으로 부상하는 걸 경계해 이런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서명을 요구한 일본이나 일본을 경멸하던 대원군의 지지세력 모두 각서 정도로 대원군의 궁정정치가 순순히 막을 내릴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실행 일자는 적당한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해 주기로 했다. [[일본]]은 출발에 앞서 명분 확보를 위해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하였고 그것을 [[한양]] 시내에 붙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근일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5백년 종사도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고종(대한제국)|고종]])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 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을미사변 동안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내 [[경복궁 강녕전|강녕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봤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을미사변을 주도했고 실행 역시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명분 면에서 도움을 줬다. [[미국인]] [[선교사]] 겸 [[외교관]]이었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의 죽음(The Passing of Korea, 1906년)'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 이런 까닭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조선]]에서 맨 먼저 상의하고자 했던 사람이 전임 [[섭정]]([[흥선대원군]])이었다는 사정은 이해하기 쉽고, 흥선대원군은 문제 해결에 대해 단 한 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20년 동안의 그(흥선대원군)의 경험은, 공사가 겨냥한 목표를 이루는 길은 하나뿐임을 그는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 자작은 당연히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을 꺼렸지만, 그도 마침내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계획임을 확신하게 된 듯하다. 그리고 [[1896년]]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판결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10월 8일 새벽 3시, [[장사]](壯士)들을 포함하는 [[일본인]] 대집단이 조선인 몇 사람들과 함게 [[한강]]에 가까운 [[흥선대원군]]의 거소로 가서 그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들이 출발할 때, 그들의 우두머리가 사정에 따라 '여우'를 처리하라고 그들을 독려했다. 그 말의 분명한 뜻은, [[명성황후|황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이 틀 무렵, 그 무리는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을 통해 [[경복궁|궁궐]]에 들어갔고, 바로 [[고종(대한제국)|대군주]]의 거처로 향했다.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 그들의 죄에 더해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입 노릇을 한 [[흥선대원군]]을 통해 살해된 [[명성황후]]의 기억을 더럽히고 낮추기 위해 온갖 짓들을 다했다. 그래서였는지 1898년 흥선대원군의 사망 때에도 아들인 고종은 장례식에 불참하여 부자간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의 친정 이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청일전쟁, 을미사변 등에 개입하여 지속적으로 정계에 복위하려 시도했고 임오군란 이후부터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안 좋았다.] [[흥선대원군]]은 그전에도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서라면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납치되기 전에도 대원군은 청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대사관이 습격당했기에 일본이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을 해 오면 청나라를 이용해 견제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게 대원군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난의 주동자라는 고종 세력의 밀고로 그는 청나라로 압송되었고 [[이홍장]]은 [[고종(대한제국)|고종]]을 택했다. 이후 고종이 일본을 통한 개화를 추진하자 도리어 청은 이를 견제키 위해 대원군을 조선에 돌려보냈다. 그러다 이번에는 반대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내각을 세운 후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대원군에게 손을 뻗었고 대원군은 주저 없이 그 손을 받았다. 더구나 그는 이때 고종을 폐위하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실권은 김홍집 내각이 쥐고 있었고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동학군, 청군과 함께 일본군을 협공하려고 했지만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둬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권력을 위해서 누구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인 명성황후를 제거해 준다는 일본의 제안은 달콤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고종과는 을미사변 이전에도 그가 주도한 폐위 시도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권력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부자 관계가 조선시대만 해도 상당한 편이긴 하지만[* 초선 초대 왕인 태조부터 태종과 갈등이 있었고 이외에는 선조-광해군, 인조-소현세자, 영조-사도세자 등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비판받아야 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이전에 비슷한 기만을 당한 경험이 있음에도 일본과 결탁해 참여했다는 것이다.[* 대원군은 여러 세력과 손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야기에 나온 것과 동일하게 외세를 이용해서 중전을 죽이고 왕을 겁박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을미사변 즈음이었다. 참고로 대원군은 자신이 집정하던 고종 초기에 연해주를 얻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천주교도들과 접촉하여 프랑스와 연결하고자 한 적이 있었다. 대원군은 이이제이 방식을 자주 사용하던 사람으로 중전의 정치적인 생명을 제거하려고 한 적은 있지만 생명까지 빼앗고자 한 것은 을미사변이 처음이다.(임오군란 때에는 군란의 이유가 중전과 척족에게 있었고 대원군이 입궐하기 전에 중전이 도망갔으며 전국에 추격령을 내리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