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미사변 (문단 편집) == 진행 == || [youtube(5JmaxSgce0A)] || || 긴급입수! 러시아 비밀문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 || 연이어 친일 관료가 실각되자, 미우라의 전임인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직접 입궐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과 황후에게 상당한 거액의 자금을 바치고 부임 직후 약속했던 것처럼 일본은 언제나 조선 왕실의 안전과 통치권을 보장한다며 협조를 부탁했다. 하지만 고종 내외는 거절하였고, 은밀히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 내각을 실각시키고 새로운 친러 내각을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조선에서의 영향력 회복을 위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논의했다. 1895년 7월 8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대신은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시 이토 내각의 대신들은 물론 내각 밖의 영향력 있던 인사들도 러일관계 및 조선문제와 이노우에 공사의 의견서에 대해 서로 논의하며 해당 편지를 비롯한 여러 서신들을 주고받았다.] [[파일:야마가타 편지 원본.jpg]] > 별첨한 글을 보고 실로 경악해 마지않았습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것은 세외(世外·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선 정부에서 친일 대신간의 알력다툼과 김홍집 등의 사표재출로 소란이 일고 있을 무렵 무쓰 외상에 의해 몇 차례 반려된 이노우에의 귀국 요청이 받아들여져 이노우에는 5월 31일 본국의 귀국 지시를 받고 6월 11일 인천을 출발해 일시귀국했다.] > >내외(內外·고종 부부)에 대해 방관 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 >묘의(廟議·각의)에서 결정(決定)되는 대로 단행(斷行)하시기를 희망(希望)합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60605/8314482/1|#]] 한국 학계에서 을미사변 배후설의 증거라고 평가받는 이 편지[* 이외에도 요시카와 아키마사 사법상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편지(중 문제되는 부분인 "미봉책을 포기하고 결행의 방침을 채택해야") 등 일부 서신들에 쓰인 표현들이 명성황후 암살을 의미한다고 해석한 것. 그에 비해 주로 일본 학계에서는 해당 편지들이 논의한 건 누군가의 암살 계획이 아니라 '이노우에안'에 대한 토의와 6월부터 9월까지 복합적인 사안들에 대해 여러 차례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고 때때로 입장 전환이 이루어졌던 과정의 증거라고 보는 편이다. 이런 양측의 견해 차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가 쓰인 7월 8일 이후 조선공사는 유신지사 이노우에 가오루에서 존재감 없는 미우라로 교체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을미사변 관여 여부, 즉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하고 명성황후 암살계획을 구체화시킨 장본인인지 아니면 이토내각과 정계, 육군의 다른 파벌들에게 밀려나 결국 하급자인 미우라에게 자리를 빼앗긴 부외자인지의 여부는 아직까지 확실치 않으며 한국에서도 논쟁중인 사항이다.][* 다만 이노우에는 본국으로 일시귀국한 뒤 부흥하던 국내 농상업이 1894~95년 전란으로 큰 타격을 입어 다시금 경제난에 빠진 조선에게 청일전쟁 배상금 중 500만 엔을 혜여하는 안 등을 포함해 원조-내정-전신-철도 등 다방면에서 상당히 온건한 정책방침을 제시했다. 일본에게 불리해진 상황 속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보다 존중하는 방향으로 조선 문제를 다루려 했으나 반대파에게 박영효 실각과 러시아의 강화된 대일압력 문제로 책임을 추궁당하며 자신의 새로운 구상을 각료들과 협의하던 중 불분명한 경위를 거쳐 공사 교체가 정해졌다. 그가 조선 외교에 있어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인물인 건 맞으나 이노우에 역시 열강들의 눈치, 당대 동아시아의 정세를 고려해 가며 외교를 수행했을 뿐이고 그는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한반도를 취급하며 (그 당시 식민화까진 아니더라도) 조선을 메이지 일본의 앞마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이노우에 가오루가 사이온지 외상대행 및 주요 관계자들에게 조선 자금지원, 재정, 철도, 전신, 그리고 논란이 된 주둔군 교체여부 등에 대해 의견서를 제출했다. 대부분 6월 4일 각의 결정사항과 비슷한 유화책이 주요 골자였다.[* 해당 사안들은 원래부터 구체적인 접근법에 있어 이노우에가 무쓰 외상 및 육군 내 강경파와 대립하던 사안들이었고 삼국간섭의 여파로 육군성, 해군성, 외무성 모두가 [[데꿀멍]] 상태가 되면서 일시적이었지만 이노우에안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7월 17일 훈련대의 충성심을 의심한 고종은 자신과 명성황후가 신임하던 [[홍계훈]]을 새 훈련대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9월 1일 , 이노우에를 대신해 [[일본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가 새로운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미우라는 이노우에와 같이 입궐해서 고종을 만났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척 연기를 하였다.[* 염주를 돌리고 불경을 외며 [[두문불출]]하여 '염불 공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왕실의 경계를 돌리려는 위장술이었다.[* 일단 전임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참고로 <바람의 검심>에서 주인공 켄신을 옆에서 도와주던 고위급 경찰이 바로 이 사람이다.--와 같이 조슈파의 거두로써, 초대 외무대신이기도 하였던 사람인 것과는 다르게 [[미우라 고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에 가까웠다.] 부임한 미우라는 명성황후 암살을 위해 공사관 1등 서기관 스리무라 후카시[* 자신의 회고록인 재한고심록에 사변의 핵심설계자는 미우라가 아닌 자신이었으며 조선 당국의 민씨 일파와 친러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대원군을 이용했다고 기술했다.], 조선국 군무고문 겸 주재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중좌 등 일부 측근들과 협력하며 우치다 경성총영사를 소외시키고 새로운 실무라인을 구성했다. 9월 24일 [[무쓰 무네미쓰]]의 병환 악화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2선 후퇴로 외상대행을 맡게 된 [[사이온지 긴모치]]가 멋대로 육군 경성수비대의 통제권을 장악하려던 미우라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실에서 황후 암살 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였다.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궁내부 고문이자 일본 공사관 [[국방무관|무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육군 [[대위]]가 대원군을 데리고 [[경복궁]]에 들어가기로 했다. 동원된 낭인들은 주로 일본의 [[겐요샤|몰락한 사무라이]] 출신자였는데, 주로 한성신보[* 일본인이 설립하고 일본어로 원문을 쓰던 신문으로, 을미사변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고종 내외를 비난하는 논조를 보였다.]의 직원들로 사장인 아다치 겐조를 비롯해 편집장과 기자들, 그리고 [[구마모토현]]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다.[*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 회부된 비군인신분 관계자 47명 중 구마모토 출신이 21명이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이때의 도쿄대학은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도쿄대학은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가 을미사변 발생 10년 전 무렵에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었으며, 1897년 [[교토제국대학]]의 개교로 제국대학 간의 구별이 필요해지자 이때부터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지금의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을 얻은 건 1947년. 그래서 초창기 제국 시절의 도쿄대학을 [[구제대학|'구제 도쿄대학']], 현재의 도쿄대학을 신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서 부른다.] 출신의 [[극우]] [[엘리트]] 학생들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삼은 것은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실제로 살해의 주범들은 전부 [[치외법권]]으로 인해 일본에서 재판을 하여 증거 불충분이란 명목으로 풀려났다.] 또한 사건을 조선 내부의 분쟁에 의한 결과로 만들려는 속셈에 따라 해산될 예정이었던 [[조선군 훈련대|훈련대]] 대대장 3명을 끌어들였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 이렇게 포섭된 인물로, 사전에 훈련대 해산계획을 알게 된 뒤 훈련대를 양성한 일본인 교관들을 통해 미우라 공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1대대장이었던 [[이두황]]은 우범선과 일본 공사관에 찾아왔다가 처음엔 거절했다가 미우라가 그러면 체포 구금하고 중대장 이범내로 바꾸겠다고 협박해 가담자로 만들었다.[* 이두황은 일본으로 망명했을때 다른 망명객들과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자기 나라 국모를 시해하고도 은인자중할지 모르는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고, 청일전쟁에서 평양성 전투때 조선인들을 동원해 전사한 일본군 시신을 수습하였으며, 일본이 순종때 이두황을 사면복권하라고 압력을 넣어 순종은 자기 어머니를 죽이는데 가담한 이두황을 정미특사로 풀어줬으며, 이후 이두황은 중추원 참의 및 전라북도 관찰사와 도장관을 지냈으며, 남한대토벌작전에도 참가하여 항일의병들을 무참히 학살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전주에는 광복전까지 그가 만들어놓은 메이지 천황과 조슈 번 출신들을 모시는 신사까지 세워져 있었다.] 3대대장은 이진호. 일본의 작전명은 '여우사냥'. 당초 계획으로는 10월 10일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7일 일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훈련대]]와 미국 등 비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 간에 충돌 사태가 벌어졌고 고종은 훈련대 해산 결정을 내렸다. 급작스럽게 해산절차를 밟게 되는 바람에 실행일을 10월 8일로 앞당겼다. 변경된 일자는 10월 8일 새벽 4시였지만, 이것 역시 틀어져 버렸다. 계획대로라면 [[흥선대원군]]은 적어도 새벽 3시에는 [[경복궁]]에 들어와 있어야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늑장을 부렸는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오느라고 늦어졌는지는 몰라도 새벽 3시에야 공덕리(지금의 공덕동) 아소정([[애오개역]] 부근)을 출발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에 도달한 것은 이미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새벽 5시를 넘겨서였다. 그렇게 이미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 버린 탓에 예정과는 달리 많은 목격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잠자던 중에 [[낭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전후 사정을 미루어 볼 때 황후 시해까지는 몰라도 폐위까지는 분명 가담했다. 일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일본의 의도를 따를 수 밖에 없던 것은 일본이 대원군의 손자인 [[영선군|이준용]][* 청일전쟁 당시 대원군의 밀사로 활동하며 대원군이 일본에게 버림받은 뒤 동학군, 청군과 접촉해 대일 공동전선 구축을 논의하다 일본에게 발각됐다. 원래부터 흥선대원군 일파의 핵심인물로 정부 요직들에 두루 임명되었고 당시에는 법무대신 김학우를 암살한 죄로 10년 유형을 받은 상태였다. 이때 박영효는 앞장서서 이준용의 사형을 주장했으나 박영효의 경쟁자들은 물론 이노우에 마저 그건 너무 심하다고 반대해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을 두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고 흥선대원군이 이준용을 선호했던 것은 맞지만 이준용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력을 위한 꼭두각시로 세울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저 당시 대원군과 [[고종(대한제국)|고종]], [[명성황후]]의 사이가 그렇게 콩가루는 아니었고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외세와 손을 잡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은 현재 사람들의 바람이 만들어낸 설 중 하나다.[* 확실히 납치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대원군이 일본 측과 적극적으로 연계해서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한 대원군이 늦은 것 역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라는 설도 있는 만큼 대원군 포섭은 '''일본이 철저하게 조선 내부의 분쟁사건으로 몰아가기 위한 작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치밀했던 사전 계획과는 달리 사건은 상당히 엉성하게 진행되었다. [[흥선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에 일본 공사관 수비대 1중대는 장소를 착각해 낭인들과 우범선이 지휘하는 훈련대 제2대대와의 합류가 늦어졌다. 이들은 겨우 춘생문 앞에 집결한 뒤,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을 향해 돌격했다. 오전 4시가 되자 [[일본]] 공관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는 춘생문과 추성문 등을 포위했다. 이때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황후도 건청궁에서 벗어나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고종은 [[이범진]]을 보내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이범진은 '''4m~5m'''나 되는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뒤(!)''' 먼저 미국 공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이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4시 30분, [[일본]] 공사관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인 훈련대 병력 등 수백여 명, 이들과 합류한 일본인 낭인 3~40여 명, 그리고 미우라에게 을미사변을 부추긴 도카이 산시(東海散士) 당시 일본 [[중의원]][* 본명은 시바 시로(柴四朗)로 미우라 고로의 친구이자 박영효 등 개화파 조선인들과 가까웠던 조선통. 이노우에를 떨어뜨리고 미우라가 신임 조선공사직에 오르 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미우라가 공사로 부임한 뒤 조선에 입국해 있었다. 본업은 언론인으로 국수주의 사상을 고취하는 책을 내 의원이 되었다. 동생인 시바 고로(柴五郎)는 후일 육군대장까지 이르렀다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자살했는데 [[러일전쟁]] 때에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이위종]]의 행적을 염탐한 적이 있다. 이 집안은 [[무진전쟁]]에서 막부 편을 들다가 일가가 거의 몰살하고 형제만 살아남은 케이스라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더 나댄 듯하다.]의 숙소에서 나온 낭인 십수명이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 집결해 전열을 다지고 한번에 궁내로 돌격했다. 사다리를 타고 궁으로 침입하는 일본군과 반란군을 [[대한제국군 시위대|조선군 시위대]][* 훈련대와는 별도로 궁궐을 지키던 부대로 일본군 교관의 지도를 받은 훈련대와는 달리 미국인 교관의 훈련을 받았다.]가 [[미국인]] 교관 월리엄 다이의 지휘를 받으며 맞섰지만 무기와 탄약이 빈약하여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전해의 [[경복궁]] 점령 당시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궁궐을 지키는 조선군의 무기, [[탄약]]을 죄다 [[경복궁 향원정|향원정]] 연못에 빠뜨렸다. 이 총들이 아직도 정비가 안 된 상태였다. 또한 탄약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탄약의 부족의 원인이 다름 아닌 청일전쟁으로 당시 주력이었던 레밍턴 소총탄들을 청군이 약탈하고 기기창의 관련 설비를 부셨던 탓이 컸다. 거기에 새로 중이었던 마우저 소총마저 독일과의 트러블로 수입에 차질이 생겼다 보니 1인당 10발만 보유하고 있던 터라 도리어 수비대가 1시간이나 저항했던 게 용할 수준이었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800375372|#]]]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을미사변 직전에 훈련대 연대장이 되었다.]이 달려와 반란에 가담한 훈련대 병사들을 꾸짖고 제지하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 무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위대 병력의 절반 가량은 궐 밖에 나가 있었고 궐 안에 있던 300명의 인원으로는 잔류하던 병력의 무기가 멀쩡했어도 무장이 훨씬 양호하던 훈련대와 [[일본군]]을 모두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시위대가 무너지는 와중에 끝까지 저항하던 무예청 무사들과 충성적인 경비병력 200여 명은 흥선대원군이 입궐하자 혼란스러워하며 전투를 중단했다. [[건청궁]]에서는 [[의화군]]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치자고 왕비께 간청했지만 왕비는 대비를 홀로 남겨 놓고 갈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정병하]]가 "두 분 전하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그대로 머물게 했다.[* 사건 이후 고종은 정병하가 일본과 결탁한 것으로 판단했다.] 경비 병력의 저항이 멈추자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이 대기하고 있는[* 당시 궁에 침입한 일본군보다 조금 더 수가 많았던 무예청과 항전파 경비병력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대단히 충성적이었고 흥선대원군의 명을 따랐다. 다시 말해 을미사변 도중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멋대로 감금할 만한 여력은 없었던 셈.] [[경복궁 강녕전|강녕전]] 앞 뜰에서 대기하고 낭인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왕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했다. 이때 고종의 외국인 고용자들도 일본 낭인들의 만행에 피해를 입었으며 태자비 민씨([[순명효황후]])는 복부를 낭인에게 가격당하여 이후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왕태자([[순종(대한제국)|순종]])가 머리채를 잡혔다. [[건청궁]] 곤녕합에 도착한 일본인 폭도들 앞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가로막았지만 [[권총]]에 맞았고 이어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려나가고 사망했다.[* 궁내부 대신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부총리를 겸직하는 정도의 실권을 가진 직책으로, 관료 서열상으로도 총리대신 다음으로 높은 관직이었다. 이런 고위 관료도 허무하게 살해될 정도로 상황이 막장이었다는 것.] 그 뒤편 옥호루에는 황후와 궁녀들이 같은 복장으로 구분이 힘들도록 앉아 있었다. 이후 황후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들의 설명이 제각각 엇갈린다. [[매천야록]]은 황후의 양녀가 된 고무라의 딸이 그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처음부터 초상화 혹은 [[사진]]을 들고 와서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의 진술을 기록한 《우범선 최후사》에서는 낭인들이 우범선을 데려와서 황후의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황후와 주위에 있던 황후로 의심되는 [[궁녀]]들을 전부 발가벗겨서 [[임신]]했던 [[임신선|흔적]]을 찾아 확인했다고 한다.[* [[궁녀]]들은 평생 처녀로 지내야 하고 임신 경험이 있는 건 황후뿐이기 때문이다.][* 황후의 용모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유방(신체)|유방]]의 처짐으로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폭도들은 황후를 찾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상의를 벗겨 가슴 검사를 하고 이후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2m가 넘는 옥호루의 창문 너머로 한 명씩 던졌다.[* 베베르 보고서에 나오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증언] 수많은 궁녀들이 죽어나가자 황후는 옥호루를 뛰쳐나와 장안당으로 달려갔다. 일본군 장교가 뒤쫓았고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낭인이 발로 차 황후를 넘어뜨렸다. 황후는 재차 뛰어 장안당 밖으로 나갔지만 그 곳에서 붙잡혀 칼에 찔렸다.[* [[윤치호 일기]]는 [[의화군]]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왕후는 자신은 왕후가 아니며 먹을 것을 찾아 들어왔을 뿐이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폭도들은 황후를 옥호루로 옮긴 후 미우라가 도착하기 전 국부 검사를 했다. 대체로 그 시각은 새벽 5시 50분에서 6시, 6시 정각 직후 등인 것으로 추정된다.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고바야카와는 왕비가 숨진 모습을 목격한 당사자로 훗날 이런 기록을 남겼다. >마침 그때, 시위대의 연대장인 [[현흥택]](玄興澤)이 군복을 입은 채 다만 허리에 찬 칼만을 버리고 겁에 질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어찌 이를 그대로 놓칠쏘냐?! 낭인들의 철권(鐵券)이 그에게 마구 내리 쏟아졌다. 그러나, 현흥택은 겨우 숨을 건져 도망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숨어버렸다. 재수 좋은 사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 곤녕합 방안에 쓰러져 있는 부인이 민비라고 하는 사실이 누군가로부터 퍼뜨려졌다. 나는 직접 방안으로 들어가 그 쓰러져 있는 부인을 보았다. 이 부인은 아직 침소에서 나온 그대로였는지, 상체엔 짧은 속적삼을 입었을 뿐이고, 허리로부터 아래로는 백색 속옷을 입고 있었으나, 무릎으로부터 그 아래는 흰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잘 보니, 가냘픈 몸매에 유순하게 생긴 얼굴과 하얀 살결은 아무리 보아도 스물 대여섯살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 >죽었다기보단 인형을 눕혀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아름답게 영원한 잠이 들어 있었다. 가냘픈 손으로 8도(八道)를 움직여 군호(群豪)를 조종했던 민비, 그 사람의 유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웅혼(雄魂)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 방안엔 유해를 지키는 단 한 명의 그림자도 없었다. 실로 처참을 극한 광경이었다. 민왕비(閔王妃)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2개의 칼날 자국에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어떻게 손을 내리쳤을까? 오전 8시경이 되어서 모두들 제각기 들고 있었던 일본도(日本刀)를 담요에다 말아싸고, 나와 식자생(植字生) 두 사람의 것은 쿠마베(隈部)라고 하는 장한(壯漢)한테 지워서 광화문을 나왔다. 문을 나서니, 구경을 나온 한국인들이 문전(門前) 한 길에 구름처럼 모여서 놀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지나가고 있었다. -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일본 문서들을 보면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일본군 장교로 나온다.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사다쓰치 경성총영사가 일본의 [[하라 다카시]][* 다음해인 1896년 조선공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훗날 수상.] 외무차관에게 보낸 문서에 그 내용이 나온다.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이다. 또 사건 1달 뒤 우치다 경성총영사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모두 4명의 소위가 있었는데 그 중 살해 현장인 건청궁에 들어간 소위는 미야모토 소위가 유일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150623120300005|#]] 다만 이 재판은 세계가 주목하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자로 장교를 내세웠을 것이기에 처음으로 칼로 찌른 자인지는 불확실하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고 도중 밖으로 나와 직접 왕후의 [[시체]]를 확인한 뒤 낭인들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미우라가 고종, 흥선대원군과 함께 3자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으로 가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웠다. 남은 유골은 훈련대에 소속된 [[윤석우]]가 몰래 빼돌려 산속에 묻었다가 나중에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상관인 우범선이 이를 태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윤석우는 훗날 황후의 시신을 멋대로 처리했다는 누명을 쓰고 교수형에 쳐해졌는데 다시 복권되어 유족이 보상금을 지급받기도 하였다. 을미사변 직후 오전 11시 미우라는 사이온지 외상대행에게 [[흥선대원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허위 보고를 보낸 뒤 하루종일 조작된 내용의 보고로 일관하다가 그날 저녁에 보낸 마지막 보고에서야 사실을 실토했다. 그 직후 사이온지는 외무성 정무차관이 이끄는 조사단을 파견해 정확한 사건 파악을 지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