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미사변 (문단 편집) == 배경 == || [youtube(SGHvv5H_f6g)] || || 영화 [[한반도(영화)|한반도]] 중에서 ||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폐기하고 조선 정부에 친일 내각을 구성시켰다. 전쟁에서 북양군을 와해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 및 [[요동 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 그리고 전쟁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 반도을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삼국간섭|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하였다]]. 그동안 러시아와 우호적인 외교를 해 왔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간의 공조를 논의했다.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 제국|아라사]]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친일 내각에 대한 축출을 단행했다.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인 고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조선)|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의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되었고 [[이완용]]을[* 이 당시엔 친러파였는데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되었다. 그러자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명성황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명성황후의 암살을 모의하지만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인해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주했다.[* 당시 [[박영효]]는 [[철종(조선)|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으로, 금릉위라는 직책도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는 오히려 반일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인지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일본으로 도망가는 박영효의 피난로를 느슨하게 했다고 하는 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 측 공문서가 증명하듯 박영효는 이노우에를 포함해 공사관은 물론 일본 민관계의 유력자들과 조선개혁을 문제를 두고 실각 직전까지 긴밀하게 협조했으며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기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면서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게 되어 일본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다.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 의혹을 점점 신빙성있게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 1884년 조러 통상조약 체결 이후 고종은 지속적으로 조선에서 기존 종주국 청과 신흥세력 일본 쌍방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필요 시 러시아와 합의해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는 것까지 고려했다. 이는 [[청일전쟁]] 후 더욱 러시아에 의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독립국의 군주로서 지나치게 러시아에 굴종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으나 장기간 침체기에 빠져 있다가 늦게서야 개혁 논의를 시작한 조선으로서는 자국의 미약한 재정상황과 전근대적 행정력만으로는 당장 외세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 없었고 힘을 키울 때까지 외부의 위협을 막아 줄 신뢰할 수 있는 후견국이 필요했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외부에서 신식군 1개 연대만 단독으로 파견해도 한양까지 단숨에 무너질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방이 취약한 상황이었고 개혁에 필요한 자금이나 전문가, 안보적 지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러시아 제국|국경상의 유일한 열강]]은 한반도의 [[부동항]]과 기타 이권 확보에 관심이 많긴 하였으나 차선책이라고 볼 수도 있는 셈.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를 교두보로 삼아 극동에서 패권을 쥐려는 러시아의 행동을 영국이 가만히 둘 리 없었고 이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과 [[영일동맹]]이 체결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 내각과 정계, 육해군부 내에선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이때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이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 미우라의 추천인이 이노우에 본인이라는 설과 달리 이노우에는 자신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의 결정이었다고 증언했다. 이토와 미우라는 이를 부정하지만 다니의 추천서나 이노우에에 대한 비판 여론이 어느 정도 공사 교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추해 볼 수도 있다. 미우라의 부임이 확정된 뒤 그동안 이노우에가 야마가타, 무쓰, 요시카와 등 각료들의 동의를 설득했던 새로운 대조선, 대러방침은 거의 백지화되었다.]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하고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 한국에서 주요 혐의자로 자주 언급되는 [[이토 히로부미]]와 기타 내각 중진들 혹은 미우라와 가까운 도카이 산시, 육군의 실세였던 가와카미 소로쿠 등 주로 일본학 계에서 사태의 배후라고 지목되는 개별 혐의자들.]은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