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행사거리 (문단 편집) === 학원가의 형성 === 그 후 [[1998년]]에 [[서라벌고등학교]]가 [[성북구]] [[돈암동]][* 현 돈암동부센트레빌아파트 자리.]에서 노원구 중계동으로 이전[* 참고로 같은 재단의 [[서라벌중학교]]는 [[강북구]] 우이동으로 이전했다.]하여 몇년 후 본격적으로 [[학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참고로 서라벌고등학교가 [[중계동]]으로 이전한지 3년 쯤 됐을 때(2001년경) [[재수학원]]을 전교생의 1/2 가량 보냈다. 은행사거리 학원가의 파워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지만 학교에선 절대 그런 얘기를 안하면서 중학교 3학년 남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선전한다. 하지만 서라벌고등학교의 명문대(특히 서울대) 진학률과 은행사거리 학원가는 별 상관없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일단 서라벌고등학교가 이전한 것은 1998년 3월이었기 때문에, 중계동으로 이전한지 약 3년 차였을 [[2001년]] 당시에는 아직 은행사거리 학원가가 현재처럼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학원가와는 별개로 서라벌고등학교 자체의 패기어린(?) 수험생 관리 요령 역시 무지막지했는데, 상위권 학생들의 철저한 학습 관리를 명분삼아 주말에 안 놀고 공부하는지 감시하겠다고 불시에 학생이 사는 집에 쳐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전직 교감이 자신의 수필집에서 자랑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성북구에 있을 당시 주변 고등학교들보다 몇 레벨 앞서는 [[스파르타식 교육|스파르타식]]으로 애들 굴리기로는 유명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유명했냐면, 과거 [[종암동]]-[[안암동]]-[[돈암동]]-[[길음동]]-[[월곡동]] 라인 안에서 오래사신 분들의 주 이야기거리 중 하나가 바로 '''[[성북구]] 일대 고등학교 서열'''이다. [[성북구]] 돌산(현재 개운산) 일대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놈들은 1지망을 서라벌고, 2지망을 부고([[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3지망을 [[대광고등학교|대광고]]로 지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전교 꼴등급 놈들은 북공업고(현재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나 미아리고개 꼭대기 고명상고(현재 [[고명외식고등학교]])로 간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돈암동 지역 어르신들에게 서라벌고는 '''공부 좀 하는 학교'''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변 학교와의 기묘한 경쟁의식은 중계동 이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아 대진고나 온수고(노원고), 재현고, 상계고 등을 대상으로 이 학교가 더 공부 빡세게 시키니 어쩌니 하는 썰들은 여전하다.]. 여기에 [[연세대학교]] 나 [[고려대학교]]등 소위 명문대에서 공대나 의대, 법대 등 입결 높은 학과에 입학할만한 점수를 낸 학생들을 족쳐서 서울대학교의 농대(현 농업생명과학대학)나 철학과 등 입결 낮은 단위에 밀어넣는[* 즉 본인의 소신이나 적성, 학과 불문하고 무조건 점수 맞춰서 서울대로 밀어넣는 행태. 어차피 학교 앞에 거는 현수막에는 학과까지 일일이 쓰는게 아니라 대충 '서울대 몇 명 진학' 이라는 식으로 쓰니까...] 기가 막힌 노하우도 한몫했다. 이 당시의 경우 서라벌고가 나름 서울대 많이 보내는 학교로 알려지면서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선택하는 학교 중 하나였고[* 이 점에서는 당시 [[돈암동]] 일대의 집값이나 하숙비가 서울 치고 저렴했던 점도 영향을 끼쳤다. 자식을 서울로 보내야 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그나마 경제적 부담이 덜했던 것.], 이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야자 강요' 라거나 '덮어놓고 서울대 밀어넣기' 등의 학교쪽 술책이 아주 잘 통했다. 오히려 중계동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학군]]제가 제대로 적용되면서 저런 미친 짓거리를 하기 힘들어졌고, 결국 노원구 중계동으로 이전한 이후 서라벌고의 서울대 진학자 수는 동네에서는 좀 많은 편이라고 하지만 '''[[돈암동]] 시절보다는 명확하게 줄어든 상태'''이다. 즉 은행사거리 버프와 전혀 상관없던 성북구 돈암동 시절에 서울대는 더 많이 보냈다. 그렇다고 서라벌고등학교의 이전과 은행사거리 학원가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게, 서라벌고등학교가 저런 식으로 학생들을 굴릴 때, 돈암동 인근의 [[대학교]] 진학지도에 별 관심 없는 몇몇 고등학교들은 전인교육 한답시고 '''[[고3]]조차도 야자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 고등학교들의 서울대학교 합격자 수는 졸업생 약 720명 중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이런 학교들이 중계동으로 이전했다면 당시 중계동의 분위기로 볼 때[* 은행사거리 인근 중대형 평수 아파트가 들어오기 전, 이미 노원구 중계동, [[하계동]] 지역은 [[서울특별시]] 시영아파트[*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건설한 아파트이다. 소형 평수로 구성 되어있는 복도식 아파트이며, 은행사거리 인근 중대형 평수 아파트가 들어오기 2~4년 전부터 [[중계역]], [[하계역]]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계동 그린(1XX), 무지개(2XX), 목련(3XX), 목화(4XX), [[하계동]] 하계5단지(5XX), 장미(6XX), 청솔(7XX) 이렇게 7개 단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한주택공사]] 임대아파트[* 이 곳 역시 소형 평수로 구성되어 있는 복도식 아파트이며, 은행사거리 인근 중대형 평수 아파트와 거의 비슷한 시기(약간 일찍) 건설되었다. 중계주공1단지, 중계주공3단지, 중계주공9단지.], 백사마을[* 믿기 힘들겠지만, 중계동 백사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이다.] 빈민층 지역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은행사거리가 절대로 입시명문 지역으로 뜰 수 없었다.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자면 서라벌고등학교와 은행사거리가 위치한 [[노원구]]는 서울 동북부 최대의 아파트 밀집지역이며,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조성된 신흥 거주지의 특성상 이 지역에 이주해 온 주민중에는 자식(학생)이 있는 학부모 연령대의 가구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주민 집단에서는 자식 교육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서민(너그럽게 기준을 적용하면 중산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세대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즉 대한민국 사교육계의 성지인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 진입할 정도의 경제적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자식 학원비 정도는 어렵지 않게 낼 수 있고, 기꺼이 낼 생각도 있는 학부모들의 비율이 높았던 것. 따라서 이들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은행사거리를 비롯한 노원구 학원가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스우면서도 슬픈 사실은, 노원구 학부모들이 은행사거리 등의 지역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강남 대치동 학원가를 부러워하듯 서울만큼 사교육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지방도시 학부모들 중 적지 않은 수는 (강남 진입까지는 힘들더라도) 노원구 은행사거리쪽에 괜찮은 학원들이 많이 있다던데 자식을 거기라도 보내서 학원 다니게 해주고 싶다고 부러워하는 점이다. 한국 교육시장의 계층화를 엿볼 수 있는 씁쓸한 풍경.][* 노원구가 배출한 유명 정치인인 [[정봉주]]의 부인이 학원을 경영했다는 점에서도 노원구 지역에 형성된 새로운 지역 사회에서 '사립 학원 경영자'가 일종의 신흥 유지로 급속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앞 문단에서는 '은행사거리 주변에 빈민가나 저소득층 거주지가 많다' 식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정확한 분석이라 보기 어렵다. 중계동 백사마을같은 경우는 80년대 말까지 대규모로 형성되었던 노원구 지역 달동네 대부분이 89년대 말~90년대 초의 대규모 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는 와중에 '남겨진' 지역에 가깝고, 대단위 아파트 개발 과정에서 소형/임대아파트가 일정 비율 이상 같이 지어지기는 하였으니 비교적 비싼 중대형 아파트의 비율이 특별히 낮지는 않다. 즉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나 안정적인 생활은 가능한 서민층 거주자 집단이 상당히 크다는 것. 결국 은행사거리의 형성과 서라벌고의 그럭저럭 괜찮은 명문대 진학률[* 단 서라벌고는 한 예시로 제시된 것 뿐이지, 노원구 지역에서도 그렇게까지 압도적으로 대학 잘 보내는 학교라고 보긴 어렵다. 예를 들어 이웃 대진고와 서라벌고는 한 학교가 '이번엔 우리가 서울대 2배 가까이 보냈다' 고 자랑하면 다른 학교는 '하지만 그건 대부분 농대, 인문대다. 의대 법대는 우리가 많다' 고 받아치는 정도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고 있다.]은 '''같은 원인에서 나타난 두 결과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규모 개발 이후 노원구 지역으로 이주한 학부모 세대들은 고도성장기의 후반부에 속하는 세대로써 '성적과 학벌이 곧 사회적 성공의 주춧돌이 된다(=좋은 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직업을 얻어 돈을 잘 벌수 있다)'는 논리를 강하게 체득한 상태였기에 자기 자식의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었던 것. 이들의 지불능력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 바로 은행사거리의 학원가이다. 또한 앞에서는 중계동 이전 이후에는 서라벌고 교사들이 더이상 무식한 짓을 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은 좀 덜해진것 뿐이다. 예를 들어 주변의 다른 학교들은 전인교육을 이유로 야자를 중단하는 것이 대세가 된 상황에서도 서라벌고는 꿋꿋하게 야자를 유지했지만 학부모들은 이런 학교의 행태에 반발하기는 커녕 오히려 환영하고 있었다. 밤 11시~12시에 야자가 끝나면 자식들을 데려가기 위해 직접 학교앞까지 차를 몰고 나온 학부모들을 보면 이들이 야간자율학습이란 제도를 기꺼이 지지하고 후원할 생각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서라벌고의 경우 교직원 교체가 별로 없는 사립학교라는 특징도 있어 돈암동 시대부터 축적되어온 아이들 쥐어짜는 노하우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고, 이 수법 중 일부만을 포기하거나 변화시키는 형태로[* 야간자율학습이나 한달에 한번꼴로 치르는 모의고사는 새로운 학부모들도 기꺼이 환영했지만, 휴일에 선생이 불시점검으로 집에 쳐들어오는 것은 환영받지 못했다는 식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여 성과를 얻어낸 것. 말하자면 은사 학원가와 서라벌고 야자는 같은 배경에서 탄생하여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두 '수단'이므로 서로 상관관계가 있고, 이 두 수단을 함께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는 정도의 관계라 볼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