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하수관현악단 (문단 편집) === 개요 === 2009~13년 동안 활동한 [[북한]]의 [[관현악단]]. 다만 대편성의 [[조선국립교향악단]], 중소편성의 [[윤이상관현악단]]과는 많이 상이한 편제를 취했다. '은하수' 라는 이름 자체는 대략 2008년부터 여성 중창단의 이름으로 북한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이 중창단은 그보다 좀 전이었던 2000년대 중반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 '국가중주단' 의 단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가중주단과 은하수관현악단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확인은 북한에서 자료를 내놓고 있지 않아서 불가능하지만, 국가중주단의 잔존 단원들을 중심으로 기악 반주를 담당할 관현악단을 별도로 꾸려놓아 만든 단체로 유추되고 있다. 지금은 그냥 젊고 외모가 되는 그런 인물들만 모아 만든 단체로 알려져 있을 뿐이지만... 일단 [[로동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김정일]]의 지시로 2009년 5월 30일에 창단되었고, 같은 해 9월 8일에 [[러시아]]의 21세기 관현악단과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합창단이 방북했을 때 [[만수대예술극장]]에서 합동 공연을 개최한 것이 첫 공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단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후에도 이 악단이 연주회를 연다고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최고 권력자가 직접 공연을 보러올 정도라 반드시 북한 언론에 머릿기사로 떴다. 악단 규모는 현악 파트의 숫자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 윤이상관현악단과 비슷한 중편성 정도의 몸집으로 보였지만, 북한의 다른 서양식 관현악단과 달리 [[드럼]]과 [[일렉트릭 기타]], [[일렉트릭 베이스]], [[신디사이저]] 같은 소위 '밴드 악기' 와 [[색소폰]] 세 대(알토-테너-바리톤)가 정식 편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서양악기 위주로 편성되었지만, 2011년 이후로 소해금과 [[가야금]], [[태평소]], [[대금]] 등을 [[북한의 악기 개량|북한에서 개량한]] 악기들이 더해지면서 서양악기와 민족악기가 거의 대등한 비율로 편성된 악단으로 바뀌었다. 색소폰도 초기 공연 사진들을 보면 알토 3-테너 2-바리톤 1의 6인조라는 대규모 편제였지만, 편성을 바꾼 뒤로는 세 명으로 줄었다. 바깥 세계에서 '팝스 오케스트라' 라고 부르는 악단 스펙에 가장 근접한 형태였는데, 특히 색소폰 주자들의 경우 간혹 중주단 형태로 악단 앞에 나와 스윙 [[빅 밴드]] [[재즈]] 풍의 [[http://musicology.co.kr/?p=1487|연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재즈나 [[블루스]], [[록 음악]] 등 서구 대중음악을 '인민의 건전한 정신을 좀먹는 [[마약]]' 이라고 대놓고 까는 북한 체제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사례였다. 북한이 바깥 세상의 음악을 진지하게 수용하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어른의 사정]]이 있는 지는 모르겠다고는 했으나 정확하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주민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을 감안하여 빅 밴드 재즈를 수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석 지휘자는 평양음악대학을 [[피아노]] 전공으로 졸업하고 모교 관현악단에서 지휘 경험을 쌓은 뒤 [[오스트리아]]의 빈 음악대학 지휘과에서 유학한 리명일과 마찬가지로 빈 음악대학 지휘과에서 유학한 윤범주가 공동으로 맡고 있었다. 리명일은 2007년 2월 21일에 남한 언론에서 처음으로 개건 이후의 평양음악대학을 방문했을 때 학교 측에서 취재진들을 위해 마련한 교내 관현악단 공연에서도 지휘를 맡은 바 있었다. 북한 측 보도에 따르면 합성 섬유인 비날론을 발명한 화학자 [[리승기]]의 손자라고 한다. 초기에는 단장 장조일과 전민철, 김충일 등이 부수석 혹은 객원으로 지휘를 분담하고 있었는데, 2012년 이후 다른 지휘자 없이 리명일과 윤범주 2두 체제로 공연을 진행했다. 단원들은 주로 어릴 적부터 조기 영재교육을 받고 평양음악대학을 비롯한 북한 각지의 음악 교육 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경력이 있는 젊은 연주자들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북한 유일의 음악 경연대회인 [[2.16예술상]]을 비롯한 국내외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특전으로 해외 유학을 갔다온 연주자들도 배속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조선국립교향악단이나 윤이상관현악단 등에서 연주 경험을 쌓은 단원들도 일부 차출해 입단시켰다. 남녀 혼합 편성이라는 것은 윤이상관현악단과도 비슷했는데, 다만 이 쪽은 뽑을 때 얼굴도 보는지 어쨌는지 외모도 출중한 편이었다. 악장(콘서트마스터)인 [[문경진]]은 2005년에 개최된 카네티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드럼을 맡고 있는 [[리진혁]]은 2000년 4월에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첫 남한 공연을 했을 때 타악기를 쓸어모은 기교파 연주로 화제가 된 인물이기도 했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 공연 말고도 인천에 제 16회 아시아육상경기대회에서 화제를 뿌렸던 남북청년학생협력단 일원으로도 방문한 적이 있으며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활동 초기에는 존재감을 살리기 위해서였는지, 해외에서 온 악단이나 비슷한 시기에 창단된 것으로 보이는 [[만수대예술단#s-3|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 등 다른 악단과 합동 공연을 하며 같이 부각시켜주는 컨셉의 공연도 종종 하고 있었다. 이후 주류가 되고 있는 단독 공연도 기악곡 보다는 악단 부속 합창단과 여러 독창자들이 협연하는 성악곡 위주의 공연이 대부분이었는데, 가사가 들어가는 노래 위주로 돌아가는 북한 음악계의 현실에 맞춘 컨셉이었다. 연주 곡목도 해외 예술단체들과 합동 공연을 할 때를 제외하면 아직은 북한 창작곡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단원들은 대부분 턱시도 차림으로 연주했지만, 태양절([[김일성]] 생일)이나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같은 국경일이나 김정일 사망 직후 열린 2012년 신년음악회 같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행사 혹은 사건을 전후해 개최되는 공연 때는 어깨에 견장이 있고 넥타이를 매는 [[조선인민군]] [[장교|군관]]들의 정복 차림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악단 단원들과 지휘자에 한한 것이었고, 독창자/독주자나 합창단은 일상적인 공연복인 턱시도(남성)와 치마저고리(여성) 차림으로 출연했다. 2011년 7월 16일에는 [[평양시]]에 악단 상주 공연장인 은하수극장이 완공되었고, [[김정일]]과 [[김정은]]이 개관 기념 음악회를 관람했다. 다만 극장 규모가 작은 편이라서, 대규모 청중을 동원하는 음악회의 경우 [[평양대극장]]이나 [[평양대극장]],만수대예술극장, [[인민극장]], 류경정주영체육관 같은 평양 시내의 대형 공연장 혹은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했다. 이외에 2012년 신년음악회 같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 [[희천시]]와 [[함흥시]] 등 지방에서도 공연한 바 있다. 2011년 7월 27일에는 악단 단장 겸 작/편곡자 장조일, 지휘자 리명일과 윤범주, 악장 [[문경진]], [[호른]] 수석 김영범과 바이올린 단원인 정선영에게 각각 김일성상, 공훈예술가, 인민배우와 공훈배우 호칭이 수여되었고, 나머지 단원들과 협연자들에게도 메달과 표창장이 수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러한 공식적인 상훈 외에 여타 예술단보다 생필품 배급에서도 특혜를 받고 있었다고 하며, 김정일 사망 후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은 첫 공식 일정들 중에 이 악단의 2012년 신년음악회 관람이 포함되었을 정도로 여전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상술한 것처럼 북한 최고 권력자가 거의 매 공연 때마다 보러 온 탓에 창단 이래 거의 모든 공연 실황이 조선중앙텔레비전을 통해 녹화되어 방영되었고, 2010년 부터는 이 녹화 자료로 목란비데오에서 [[DVD]]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어 2011년에는 실황녹음 자료들로 같은 회사에서 [[CD]]도 발매했고, 2012년 6월 현재까지 모두 열세 종류의 DVD와 열네 종류의 CD가 나왔다. 물론 예술단의 공연 활동과 음반과 영상물 제작을 모두 국가에서 통제하고 있는 북한의 실정 상 이렇게 악단 이름을 내건 영상물과 음반이 나오는 것이 드문 사례는 아니었지만, 창단된 지 2~3년 밖에 안된 초짜 예술 단체가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는 전무했기 때문에 북한에서 이 악단을 얼마나 정책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지를 알 수 있었다. 2012년 3월 14일에는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의 살르 플레옐에서 첫 해외 공연을 개최했다. 1부에서는 윤범주와 리명일의 지휘로 '그네뛰는 처녀'등을 비롯한 북한 창작곡 네 곡과 [[카미유 생상스|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문경진]] 협연)'를 연주했고, [[정명훈(지휘자)|정명훈]]이 지휘하는 2부에서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동으로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브람스)|교향곡 1번]]을 연주했다. 이 공연은 프랑스와 [[독일]]의 합자 방송사인 아르테와 시테 드 라 뮈지크의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생중계되었다.[[http://sites.radiofrance.fr/chaines/formations/philharmonique/saison/?ID=335070135|라디오 프랑스의 공연 관련 사이트]] 2012년 3월 29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정령으로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물론 이 훈장은 웬만한 평양 소재의 다른 국립 예술단들도 한두 개씩 지니고 있지만, 다른 예술단에 비하면 갓난아기 정도의 연혁을 지닌 악단이 받은 것에서 이 악단이 북한 사회에서 보여주고 있는 [[미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2년 7월 25일에 북한 언론들이 김정은의 아내에 대한 신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는데, 이 때 나온 정보와 그 직전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언론에서 나온 보도나 기사를 합쳐본 결과 이름은 [[리설주]]고 이 악단 소속 독창 가수 출신이었다고 밝혀졌다. 2013년 들어서도 [[모란봉악단]]에는 조금 밀리지만 여전히 부각되는 예술단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4월 8일에 악단 성악가 장영옥과 [[트롬본]] 단원 유원철이 인민배우 호칭을, 가야금 주자 조옥주와 소해금 주자 남은하, 김수명, 김형일, 리정희 (이상 악기 불명)가 공훈배우 호칭을 수여받았다. 약 한 달 뒤인 5월 11일에는 리명일과 함께 악단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윤범주가 공훈예술가에서 인민예술가로 승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