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전군 (문단 편집) == 생애 == 1759년([[영조]] 35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세 살되던 1761년(영조 37년), [[의대증]]이 있던 [[사도세자]]가 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갑자기 발광하여 그의 생모인 수칙 박씨 빙애를 구타하고 살해했다. 빙애를 구타할 때 사도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도 칼로 치고 문 밖 연못에 던져버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이자 은전군에겐 새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가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 고작 세 살의 나이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구타당해 죽은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약 1년 뒤에 [[임오화변|아버지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죽었다]]. 당시 [[혜경궁 홍씨|혜경궁]] 소생의 적자 [[정조(조선)|정조]]도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하루아침에 부모를 모두 잃었기에 상궁들이 은전군을 길렀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정조(조선)|정조]]를 견제하던 [[노론]] [[벽파]]의 강경파는 은전군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손에 어머니를 잃었기에 아버지에게 적개심을 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자녀들 중에서 그를 유독 주목하며 왕위계승자로 추대하려고도 했다.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정조의 친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 일족들도 끼어 있었다.[* 은전군 추대에 홍낙임의 이름이 나온 건 당시 집권당의 반대파여서 끼워넣은 것. 당시 역모기록을 읽어보면 가담한 게 아니라 이름이 나온것에 불과했다. 홍계능과 몇몇이 태전 서갑편을 이야기하며 주고받은 말들을 역모로 몰았는데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반정은 10년을 준비해야하고 홍낙임은 외척이라 그때쯤이면 왕의 신임을 받아 군권을 가지고 있을테니 그런 인물을 끌어들이면 유리할 것이다" 정도의 언급이었고 본인은 그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정조가 직접 불러서 해명받고 무죄방면하고 속명의록에 기록하게했다.] 1771년(영조 47년) 종친부 유사당상이 되었고, 이후 수덕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사용원 제조, 흥록대부, 현록대부를 거쳐서 이복형인 [[은언군]]과 함께 수은묘에서 전작례를 행하였다. 1776년(영조 52년)에 [[영조]]가 사망한 후, 이복형인 [[정조(조선)|정조]]가 즉위하였다. 정조는 자신의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전횡한 [[홍인한]], [[정후겸]]을 처형하고 고모 [[화완옹주]]를 사저로 내쳤다. 하지만 조정의 지배자들이었던 그들을 내치자 홍상범, 효임 모자가 강용휘, 전흥문을 포섭해 존현각에 침투시킨 것('''정유역변''', 정조 암살 미수 사건)을 시작으로 풍산 홍씨를 비롯한 그들의 잔여 세력이 대거 역모를 꾀했고 차례로 처형당했다. 이때의 주모자 중에는 '''정조의 친 외삼촌''' 그러니까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인 홍낙임도 끼어 있었다. 이덕일 세력이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사도세자]]에게 적대적이었다"는 걸 강조할 때 홍인한 외에도 써먹는 떡밥 중 하나이다. 참고로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바로 [[현빈]], [[한지민]] 주연의 [[역린(영화)|역린]]인데 영화에 대한 평가가 나쁘다. 이들이 은전군을 옹립하려 한 것으로 드러나자, 온 조정 대신들이 대의를 위해 은전군을 법대로 죽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조(조선)|정조]]는 모든 대신들 및 삼사에서 은전군에 대한 사형 요청을 수십번이나 했을 때 처음엔 '내 형제 중에 [[은신군]] 이진은 일찍 죽고, [[은언군]] 이인은 병약해서 목숨만 겨우 붙어 있다. 겨우 사람 꼴 하고 있는 건 은전군 뿐이니 양해해 달라' --유일한 브라더야 살려주라.-- 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요구가 완강하여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은전군에게 자진[* 자살]할 것을 명했다. 물론 은전군은 역모를 꾸민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죽을 이유가 없다며 거부하고 반항했다. 특히 왕족은 자신도 모르게 역모의 수장으로 추대된 경우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영문도 모르고 죽는 은전군은 반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은전군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했고 정조도 이에 못이겨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사약]]을 내려 은전군은 강제로 사약을 먹고 죽게된다. 이때가 1778년(정조 2년), 은전군의 나이 갓 20세 때의 일이었다.(만 19세) [[조카]]인 [[전계대원군]]의 아들 [[철종(조선)|철종]]이 즉위한 후, 1850년(철종 1년)에 대사헌 서영순의 [[상소]]로 복권되었다. 1871년(고종 8년)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효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