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융건릉 (문단 편집) == [[건릉]](健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40515_160730_HDR.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aninweb.synology.me/1062731519_NM89TqDv_DSC_3064_res.jpg|width=100%]]}}}|| || '''건릉''' || '''건릉의 정자각'''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건릉1930.jpg|width=100%]]}}}|| ||<-2>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20년대 건릉(健陵)의 모습''' || 조선 제22대 왕 [[정조(조선)|정조선황제]][* 대한제국때 추존 황제되었다.]와 그 부인 [[효의왕후|효의선황후]][* 대한제국때 추존 황후되었다.]의 합장릉이다. 본래 융릉의 서쪽 언덕에 매장했다가, 효의왕후가 승하한 뒤 정조의 능을 융릉 동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전반적으로 조선왕릉의 표준을 따르고 있으며,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융릉]]과 비교해보았을 때, 융릉이 봉분에 화려한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데 반해서, 건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르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다만, 19세기 조선 후기의 왕릉 형식 답게 석물들이 화려함을 갖추고 있고, 문인석도 금관조복(문무백관들이 국가행사 때 입는 대례복)을 입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융릉과 같이 정자각 앞쪽을 굉장히 넓게 조성하였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사도세자]]와 [[정조(조선)|정조]]를 황제로 추숭하고 융릉과 건릉을 황제의 릉으로 조성하면서 그 격식에 맞게 꾸민 거라고 한다.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大韓 正祖宣皇帝 健陵 孝懿宣皇后 附左)"라고 되어 있다. 2011년 11월 29일에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추정되는 곳이 발굴 되었다.[[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28584|출처]] 발굴지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 되었는데, 백자명기, 백자호류, 칠기함과 궁중제례악에서만 사용하던 편경과 편종이 출토되었다. 이 중 뚜껑이 있는 단지는 18세기 백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형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