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휴 (문단 편집) == 사상 == > "백골이나 [[어린이|아약]](兒弱)[* 각각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簽丁)을 말한다.]의 (군포를 거두어) 살가죽을 벗겨내고 골수를 부수는 가혹한 정치에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치는 근심과 괴로움, 놀고 먹는(游食)하는 선비나 운좋은 백성처럼 부역을 피하고 스스로 편하게 지내려는 자의 원망, 이 둘 중에 누가 더 크겠사옵니까? 집이 있고 몸이 있는 자에게 용과 조로 포를 거두는 것과 이미 죽은 자나 어린 아이가 군역을 지는 것 중 어느쪽이 더 낫겠사옵니까? 진실로 어느 쪽이 더 백성의 원망이 되겠사옵니까?" >---- >숙종실록 6권, 숙종 3년(1677, 정사년) 음력 12월 19일(신유일) 1번째 기사 >"사색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사색한 것은 글로 기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색하고 기록하고 해석하다보면 깨닫고 알게 되어 언행이 두루 통하게 된다" [[대사헌]]으로 있을때 사치를 금하겠다고 죽은 관까지 다 열어보는 융통성 없는 일 처리로 구설수에 올랐고 이때 적이 제법 생겼다고 한다. 북벌론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만과 실시, [[승병]] 조직, [[오가작통]]법 등 그의 제안 중 받아들여진 것도 상당하였으나 [[과거]]제 폐지, 독륜거 제작[* 산악이 많은 조선 지형에는 무용지물이란 이유로 같은 남인이였던 [[유혁연]], 권대운 등이 비웃었다.] 등 현실성이 없는 제안들은 [[유혁연]], 권대운, 김석주, 허적 등 당시의 실세 대신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윤휴는 호패를 차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많자 그는 종이 호패(지패)를 만들어서 반드시 지니고 다니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오군영 위에 도체찰사부를 설치하여 병력 지휘 체계를 하나로 통합, 북벌에 용이하게 대비할 수 있는 군사 체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윤휴의 체찰사부 설치 주장에 대해서는 "북벌 대비" 와 "병권 장악"이라는 두 측면의 목표를 모두 내포한 것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그는 북방에 성곽을 쌓아 [[청나라]]를 칠 때를 대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삼번의 난|오삼계의 반란]] 등으로 청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이었으므로, '''북벌'''이라는 대의를 위해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강화시켜 북벌을 이루자는 논지를 주도한 셈이다.[* 하지만 이후 전개를 보면 후자는 결국 경신환국 때 빌미를 제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