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휴 (문단 편집) === [[경신환국]] === [[1680년]], 정원로의 고변으로 삼복의 옥 사건이 터지며 [[허적]]과 [[허견]] 부자, [[유혁연]], 이원정 등 청남 탁남할 것 없이 남인의 수장들이 연루되었고 윤휴도 연루되게 된다. 서인들은 당시 북벌론을 주장하던 그의 주장을 근거로 그를 역적으로 몰고 갔다. [[김석주]]는 처음에는 윤휴의 북벌에 동의하였으나 [[허견]]의 옥사 당시 서인들이 허적, 윤휴 등의 주장을 근거로 역적으로 몰고 갈 때 [[변호]]하지 않았다. 결국 1680년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으면서 "[[나라]]에서 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있느냐"고 항변했는데 그의 발언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송시열은 윤휴와 허목 사후에도 두고두고 미워하면서 윤휴와 허목 등의 제일 큰 죄는 '국가 모역죄'가 아니라 '주자 모욕죄'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송시열은 윤선도보다도 윤휴와 허목을 이상하리만큼 노골적으로 증오했고 [[악마]]와 동급으로 취급하게 된다. 송시열과 그 [[제자]]들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참람한 적, 역적 윤휴, 검은 물이라는 뜻이다.], [[허목]]을 독물(毒物), 독극물, 연인(漣人), 또는 연한(漣漢), 지비공(紙鼻公) 또는 지비옹(紙鼻翁)이라 불렀다.[* "연인, 연한"은 [[지역드립|허목의 고향 연천을 들어 "연천 사람, 연천 놈"이란 뜻으로 한 말]]이었으며 "지비공, 지비옹"은 허목이 [[호흡기]] 관련 질환이 있어 코에 [[종이]]를 붙이고 다녔던 것을 두고 [[조롱]]한 말이다.] 이후 윤휴의 사상과 주장은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후손]]들은 1907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것을 언급을 꺼렸는데 1907년 [[이완용]]에 의해 복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