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휴 (문단 편집) === 젊은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윤효전.png|width=100%]]}}}|| || 윤휴의 아버지, 윤효전의 초상화 || 아버지 윤효전은 [[북인]] 출신 정치인이었지만 1619년에 죽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면서 북인 집안 사람이던 윤휴 역시 출세길에 제한을 받는다. 그는 각지를 유람하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도]], [[윤선거]], [[윤원거]], [[윤문거]], [[권시]] 등을 만나 친분을 다지는데 특히 인조반정 [[공신]]들에게 찍혔던 송시열과 가까이 지냈다. 윤휴와 송시열 둘 다 [[병자호란]] 이후 한때 벼슬길을 기피했던 점, 학문의 경지가 깊었다는 점, [[북벌]]로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뜻이 잘 맞았고 아주 좋은 친구 사이가 됐다. 둘의 사이가 나이와 당파를 떠나서 매우 친하여 [[이유태]] 등은 마치 율곡 [[이이(조선)|이이]]나 [[제갈량]]의 환생과도 같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는 윤휴도 서인들과 두루두루 친했다. 그러다가 둘이 원수지간이 된 것은 효종 4년(1653) 윤휴가 [[주자(철학자)|주자]]의 중용장구가 틀렸다고 다시 쓰게 되면서인데 주자에 목숨을 걸었던 송시열은 "주자의 서술에서 1자 1획을 더하고 빼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라면서 아예 틀렸다고 다시 짓는 윤휴를 찾아가서 극렬히 화를 냈다.[* 다만 이는 일반적으로 세간에 알려진 송시열의 주자 맹신 때문이 아니라 '오직 군왕만이 [[유교]]적 깨우침을 이룰 수 있다'는 윤휴의 [[해석]]에 대해 송시열 등 당시 수준있는 [[문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때문이다. 조선 [[성리학]]이 막연한 편견과 달리 완전히 꽉 막힌 [[학문]]은 아니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당장 송시열만 해도 주자의 학설에 대해 이상하다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들을 모은 문집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주자가 학문의 진로 개척과 발전에 큰 공로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후학들이 학문 [[연구]]와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새로운 길을 찾고 업적을 이루었듯이 [[선배]]들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사상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주자를 비롯한 각종 유교 경전과 [[고전]] 등에 대해 새로운 분장, 분구 및 해석을 시도하였다.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경서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주자의 주해와 저서는 물론 다른 유교 경전에 대해서도 재해석을 했다. 또 [[이황]], [[이이(조선)|이이]] 등의 이기론을 비판했는데 그는 성리학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성리학 사상만이 완벽한 진리라는 사고관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 자세는 나중에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규탄받게 되었다.] 한참 동안의 논쟁 끝에 윤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선포했다. 얼마 뒤 화가 풀렸는지 아님 사문난적이라고까지 한 것은 너무했는가 싶었는지 송시열은 윤휴를 다시 찾아가서 "아직도 주자의 해석이 그르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으나 윤휴는 "'''공은 어째서 주자만이 [[공자]]의 뜻을 알고 나는 모른다고 하는가?'''"[* 남기제(南紀濟, 1747∼1813) <아아록(我我錄)> 출전.]하면서 완고하게 뜻을 고수했고 이후 송시열은 다시는 윤휴를 찾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같은 서인들에게도 과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윤휴도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파악했다는 사상, 성리학만이 사물의 진리라는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오랜 [[친구]]인 송시열 등과 [[절교]]하게 된다. 이후 서인 측에서는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집요하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송시열이 그 뒤에도 윤휴를 다른 자리도 아니고 [[세자]] 시강원 자리에 극구 천거한 적은 있다. 이게 와전되어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주자 [[모독]]죄'로 처형당했다면서 조선을 유교 [[탈레반]]이라고 매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윤휴는 [[역모]]에 휘말려 죽은 것이고 그런 황당한 [[죄]]로 죽은 적이 없다.[* 그 뒤로도 송시열을 포함해서 서인들은 윤휴의 재주를 높이 사서 그를 계속 천거했다.] 송시열의 사문난적 소리가 나오자 서인인 [[민정중]], [[원두표]], [[안방준]] 등은 "어쩌라고?"라는 반응을 보였고 조정에서도 "해석이 주자랑 좀 다르면 어떻습니까? 좋은 선비면 그만이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주자나 성리학만이 사물의 진리를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과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유교의 틀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목]]은 그보다 한 발 나아가 유교 사상이 아니더라도 사물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사상은 존재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