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회 (문단 편집) === 부정론 === 우선 사후세계와 존재의 근원에 관한 질문인 [[십사무기]]에 대해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대답을 거부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윤회를 부정하는 [[육사외도]]들의 주장을 부처가 배격한 것은 상주론(윤회긍정), 단멸론(윤회부정) 모두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을 낳는 질문이였기 때문이다. [[설지(승려)|설지]]와 [[강병균]]은 붓다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한 점을 고려할 때, 그가 말한 윤회는 무아윤회라는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고타마에 의하면 당시의 철학자들은 결국 해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문제로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집(確執)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결과로 생각지도 않은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고타마는 이와 같은 논쟁은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라 하여 논쟁에 가담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와 세계는 상주(常住)한 것인가 혹은 무상한 것인가? 나와 세계는 유한(有限)한 것인가 혹은 무한(無限)한 것인가? 신체와 영혼(靈魂)은 하나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완전한 인격자는 죽은 뒤에 생존하는가 혹은 생존하지 않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나왔을 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14無記> 또는 <捨置記>). 왜 대답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런 식의 형이상학적 문제의 논의는 무익한 것이어서 진실한 인식(認識, 正覺)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여 기타의 것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철학설이 어느 것이나 특수한 집착에 기인한 편견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성찰(省察)하면서 내면의 적정(寂靜)한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실한 바라문 또는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도리를 설파하는 것이라 표방하고 있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생활해야 할 도리를 밝힌 것인데, 이 도(道)나 또는 규정을 법(다르마)이라고 불렀다. 불교의 실천적 인식이 최초로 당면한 문제는 인생의 고(苦)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어디에 있거나, 또 어떠한 것에 의지하더라도 고(苦)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고(苦)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B%8F%99%EC%96%91%EC%82%AC%EC%83%81/%EB%8F%99%EC%96%91%EC%9D%98_%EC%82%AC%EC%83%81/%EC%9D%B8%EB%8F%84%EC%9D%98_%EC%82%AC%EC%83%81/%EB%B6%88%EA%B5%90#%EC%9B%90%EC%8B%9C%EB%B6%88%EA%B5%90%EC%9D%98_%EC%82%AC%EC%83%81|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인도의 사상 > 불교 > 원시불교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흔히 윤회라 하면 죽고 난 뒤 다시 태어나는 것, 또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 개나 돼지로 환생하므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근거 중 하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 철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에 매료됐던 사람들은 이 윤회 사상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며, 게다가 축생으로까지 환생한다고? 이 윤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해인사 주지인 현응 스님이 펴낸 ‘깨달음과 역사’(해인사 출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님은 우선 사람들이 윤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윤회란 말은 본래 불교 언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윤회의 개념은 불교 이전 고대 인도 종교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붓다가 살던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은 한 번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이 재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한다. 먹을거리와 일용품이 부족한 빈곤하고 불평등한 사회체계에서는 삶이란 괴로움의 연속이므로 삶의 재생,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을 낳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해탈 사상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이런 해탈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고행이나 제사 같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 삶이란, 존재란 변화와 관계를 통해 이뤄나가는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위배된다. 현재 삶에 대한 불만족이나 고통은 단지 빈곤이나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어떤 도달해야 할 ‘절대’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이들에게 현재의 삶이란 왜곡된 모습이기 때문에 탈피해야 하고 따라서 해탈해야 할 대상이다. 현응 스님은 윤회가 아니라 ‘연기’적 삶을 강조한다. 연기적 삶은 ‘나’ 혹은 ‘내 삶’에 얽매임 없이 변화와 관계로서의 열린 자세로 자유롭게 역사를 꾸려가는 것이다. 윤회가 현실에 두려움을 갖고 죽고 태어나는 일에 얽매이는 것이라 하면 연기는 삶을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원처럼 연속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시 스님의 말이다.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 아니겠는가. 곧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현 상태에서의 안주와 좌절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뜨거운 윤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http://weekly.donga.com/3/all/11/78062/1|윤해의 오해와 진실]]][* [[https://www.youtube.com/watch?v=mcbjoEKlyoc&t=332s|제314회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윤회를 완전히 부정하는것은 아니나 일부 부정)]]] {{{#!folding [ 어떤 이가 작성한 이에 대한 질문과 답변 ] 단순히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과 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업설'은 구분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환생에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되는 불교나 힌두교 등의 윤회환생설 외에도 업과 상관 없이 무작위적으로 내생이 결정되는 환생 또한 포함된다. 업에 의한 윤회환생설만으로 논의를 한정짓는다 하여도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는 [[힌두교]]의 환생과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의 환생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업설에 의거하여 오해하기 쉬운 점들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다?''' 불교의 업설은 과거에 지은 업 외에도 현재에 지은 업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자신이 지었던 업이 있더라도 현재 본인의 의지에 의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본 것이다. '''즉 불교의 업설 혹은 인과응보설은 과거 업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으나 현재 행위에 따라 과거 업 종자(種子)의 발현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자유의지]]설과 숙명론([[결정론]]) 모두를 배격한다.''' 만일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불변하는 숙명이 있다면 이것은 불교의 인과나 연기설에 위배된다. 때문에 석가모니는 출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계급을 인정하지 않고 행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기반으로 하여 불교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승가 구성원의 평등을 보장하였다. >이름이나 가계는 >세상에서 다만 정하여 쓰는 것일 뿐, >관습에서 생겨서 여기저기 쓰인다. >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릇된 견해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알지 못하고 그들은 단언한다.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된다.’고. >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의해 브라흐민이 되기도 하고 >행위에 의해 브라흐민이 안 되기도 한다. >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고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행위에 의해 하인이 되고 >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고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제왕이 된다. > >참으로 지혜로운 이는 >이처럼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다. > >- 맛지마니까야 : 98 와셋타경, Vasettha sutta '''2. 불교의 업설이 지배층의 권력강화, 신분차별, 약자와 동물 학대 및 방관/방치 등을 정당화한다?''' 불교의 업설을 오해하여 전생에 죄가 많은 탓에 이번 생에 약자나 동물 등으로 태어났으니 차별이나 학대를 당하여도 상관이 없다는 식의 착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업설이 때로 왕즉불 사상과 같이 지배층의 권력강화와 신분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의 자의적인 왜곡이지 불교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며 현재 행위에 따라 업보가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평등을 천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대승 불교의 불성, 여래장 사상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여래장 사상에 기반을 둔 선종이 평민이나 지방 호족에게 각광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종교이며, 신분차별과 무관한 불교의 업설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교리를 왜곡한 지배층을 비판해야 한다. 지배층에 의한 자의적인 왜곡은 비단 불교뿐 아니라 유교, 기독교나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거의 모든 종교나 사상, 이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업설이 약자나 동물을 학대하거나 방관/방치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업설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 해당한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과보를 받는 자작자수(自作自受)가 원칙이기에 자신의 과보는 타인과 무관하다. '''따라서 업보와 관련없는 타인이 업보를 빌미삼아 차별하거나 학대/방관/방치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를 수 없으며, 그러한 악행의 과보는 고스란히 악행을 행한 당사자가 지게 된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수없는 윤회환생을 거치며 모든 중생이 나의 부모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므로 부모였던 중생에게 자애와 연민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또한 수없는 윤회환생 중에 나 역시 고통받는 다른 중생처럼 괴로움을 겪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우월감이나 자만심을 갖지 말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 >- 어머니의 경 (Mātusutta, S15:14) >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 불행의 경 (Duggatasutta) '''3. 불교의 선악 기준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 혹자는 선악의 기준이 특정 종교에만 해당되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보편적일 수 없고, 따라서 선악에 따른 과보도 정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기준은 특정 개인의 사상이나 종교 교리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다만 엄격하게 공리주의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불교의 선악은 '어떤 의도로 행위를 했는가', '무지한 채로 행위를 했는가, 올바른 앎이 있는 상태에서 행위를 했는가'와, '그 행위가 유익한가(samma)'를 함께 고려한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참으로 애호(愛護)할 만한 안온한 과보를 초래하며 유정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선업(혹은 복업福業)이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업을 불선업(혹은 비복업)"이라고 한다. 즉, 행위의 대상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여부로 선악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불교의 업설은 특정 종교에만 해당하는 교리가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4. 업보(과보)를 내생에만 받고 현생에는 받지 않는다?''' 흔히 현생에 지은 업의 과보를 마치 내생에서만 받는 것으로 착각하나 이는 불교 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억측에 불과하다. 《아비달마구사론》에 의거한 불교학자 권오민의 설명에 따르면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그것을 낳게 하는 인연에 따라 각기 다르다.''' 한 나무에 맺힌 씨앗이라 할지라도 견실하고 열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한 시간에 싹트지 않으며, 설사 그 같은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조건, 이를테면 습도나 온도에 따라 일찍 싹트기도 하고 늦게 싹트기도 하는 것이다. 혹은 아마(亞麻)는 심은 지 세 달 반이면 그 결실을 맺지만, 보리는 여섯 달이 지나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업도 그 성질에 따라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업에는 그 과보를 낳는 시기가 결정적인 정업(定業)과 그렇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다. 이를테면 무거운 번뇌나 맑고 깨끗한 마음에 의해 일어난 업, 즉 극악과 극선의 마음에 의해 조작된 업이나 습관적으로 행해진 업, 불·법·승이나 번뇌를 끊은 성자 등에 대해 일으킨 업, 그리고 부모를 해코지하는 등의 업이 정업이다. 그리고 부정업은 강력한 세력의 업이 아니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시기뿐만 아니라 이숙과의 내용도 결정되지 않은 업으로서, 이는 전적으로 또 다른 조건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유동적인 업이다. 정업에는 다시 그 과보가 현생에 바로 나타나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또는 順現業)과, 다음 생에 나타나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 또는 順生業)과,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 또는 順後業)의 세 가지가 있다. [[금강경]]을 비롯한 일부 경전에서는 이런 순차생수업이나 순후차수업으로 발현될 나쁜 업이라도 경전을 읽거나 수행을 함으로써 현생에 미리 발현되게 할 수 있다고 설한다.[* 《금강경》<능정업장분> "또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움에도 불구하고 만약 남에게 업신여김등 천대를 받으면 이 사람은 지난 세상(先世)에 지은 죄업으로 악도(惡道)에 떨어질 것이었지만, 금생에 남의 천대를 받는 탓으로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하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위 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 또한 이를 근거로 경을 읽었는데도 인생에 고통이 많다고 해서 경 읽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럴수록 열심히 독송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5. 하나의 업만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업보도 하나뿐이다?''' 오직 하나의 업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왜 업은 하나인데 과보는 다면적인지(예를 들어 가난한데 외모는 출중하거나 건강이 안 좋은데 부유한 경우 등)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업이란 '의도적 행위'를 지칭한다. 즉 신체, 언어, 정신으로 지은 모든 의도적 행위들을 업이라고 정의하며 따라서 지을 수 있는 업도 무수히 많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한다. >중생은 의도를 가지고 몸(kayena)과 말(vacaya)과 마음(manasa)으로 업을 짓는다. >- 업의 논의 (Kamma-Katha) '''수많은 업들은 서로 내적인 직접적 원인(인, 因)과 외적인 간접적 조건(연, 緣)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여 다양한 과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에 의하면 위에서 예로 든 경우처럼 다면적인 존재로 환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6. 윤회하는 자아나 주체가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윤회란 그저 자성이 없는 업의 과보일 뿐이라고 본다. 다만 윤회의 자세한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부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 [[상좌부 불교]]의 논서인 아비담마에서는 죽기 직전의 마음인 사몰심[* 이때 자신이 태어날 다음 생의 모습이 표상으로 보인다고 한다.]이 먼저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찰나 동안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을 거쳐, 바로 이어서 다음 생의 잠재의식(바왕가 찟따, bhavangga-citta)이 일어난다고 본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명과 갈애의 힘으로 연달아 일어난다고 한다. 또한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간답바(gandhabba)라는 정신체[* 단, 정신체라고 보는 의견을 거부하고 단순히 '개체를 지속시키는 마음'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가 정자와 난자와 만났을 때 수태가 이루어진다고 설하며, 일부 논사들은 간답바가 12연기 중 행과 식 사이에 개입한다고 본다. 이 간답바에 대한 일부 상좌부 주석서의 묘사를 보면 생명이 수천 년 단위로 오래 유지될 수 있다거나, 감각기관이 없어도 감각을 느낀다거나 하는 등 대승 불교의 중음신과 비슷한 점이 많다. 주의할 점은 '''사몰심이든 재생연결식이든 잠재의식이든 간답바든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 [[티베트 불교]]를 포함한 [[대승 불교]]에서는 새로운 육체를 갖지 않은 중간 상태로서 바르도(bardo, antarabhava, 중음/중유)라는 단계가 있음을 설한다.[* 이러한 관점은 [[부파 불교]]의 설일체유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상좌부에서는 바르도를 인정하지 않으나, 이런 사후체험 자체는 인정한다. 다만 짧은 시간 동안 아귀도에 태어났다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두고 중음의 단계라고 착각할 뿐이라고 본다.] 죽을 때의 마지막 의식에 이어, 무명과 갈애의 힘으로 생전 육체와 똑같이 생긴 정기(精氣) 형태의 신체인 중음신이 생겨나고 그 신체에서의 의식이 일어난다.[* 중음신이 생겨나는 시점은 신체적 죽음 이후 사나흘 뒤로 본다.] 중음신은 중음 세계에서 최대 49일간 머무르며 다음 환생처를 찾아 여정을 떠난다. 이때는 다양한 표상들이 보이며, 생전의 업에 따라 성스러운 표상이 보일 수도 공포스러운 표상이 보일 수도 있다. 이때 만약 중음신이 인간 남녀가 성교하는 표상을 보게 되어[* 이때 인간 남녀의 표상이 보였다고 해서 무조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생전의 불선업에 따라 동물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런 표상을 볼 수도 있다.] 음욕을 일으키면 중음신의 의식은 아버지의 정(정자)과 어머니의 피(난자)와 감응하고, 이때 수태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감응한 중음신의 업에 따라, 모체는 물론 집안 분위기가 좋거나 나쁜 방향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고 본다. 윤회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식의 생멸은 명상이나 경전 독송, 염불 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냥' 알아지기도 하고, 오온의 흐름을 역순으로 관하는 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되짚어 관할 수도 있다. 불교 문헌에서 '전생과 내생을 안다'라고 하면 대개 이런 체험의 영역에 해당한다. 수행자는 이를 있는 그대로 체험해서 알 뿐, 이런 전생이나 내생 역시 '나'가 아님을 알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