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태영(정치인) (문단 편집) == 생애 == [[1961년]] [[1월 10일]] [[경상남도]] [[진해시]][*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서 태어났다. [[대신고등학교(서울)|서울대신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는 운동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번역]] 일을 하다가 1988년 [[통일민주당]] 국회의원이던 [[노무현]]의 보좌관으로 취직하며 노무현과 인연을 맺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노무현]]이 1993년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집필할 때 도움을 주며 노무현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특히 글쓰는 데 재주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사교성이 좋아서 노무현의 총애를 받았다. 1990년부터 [[민주당(1990년)|민주당]] [[이기택]] 전 의원의 비서로 일하다가 1997년부터는 [[한나라당]] [[김재천]] 전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후 2000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해 문희상 전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 2001년 3월부터 노무현 캠프에 합류해 캠프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 2월 [[대통령비서실]] 연설비서관을 시작으로, 2003년 5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청와대]] [[대변인]]을 역임하였으며, 2004년 7월부터 2006년 8월까지는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수행하는 수행비서 격인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역임했다. 2005년 11월부터 2006년 8월까지는 제1부속실장과 연설기획비서관직을 겸임했다. 참고로 연설기획비서관 후임은 [[김경수]]. 2006년 8월에는 [[정태호(정치인)|정태호]]의 후임으로 또다시 청와대 대변인을 맡아 2007년 4월 [[천호선]]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12756&code=|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 퇴임 후에는 [[양정철]], [[권순욱]] 등과 함께 주기적으로 [[봉하마을]]을 방문해 [[참여정부]]에 대한 기록 집필 작업을 주로 담당하였다. 그러나 2009년 노무현의 서거로 관련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노무현 서거의 충격으로 3년 가까이를 폐인으로 살다가 그의 친구 [[문재인]]이 201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문재인을 도왔다. 그 유명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가 윤태영의 작품이다. 2015년 장고를 깨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자신의 일화를 다룬 '바보 산을 옮기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당내경선에서는 [[문재인]] 대신 [[안희정]]을 지지했고, 안희정 캠프에서 TV토론을 총괄했다. 그러나 문재인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결과에 승복하고 [[국민주권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하였으며,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취임사를 작성했다. 2017년 10월 [[전해철]], [[이광재]]와 함께 [[노무현재단]] 이사로 선임됐다. 이후 직접적인 정치 활동 대신 [[노무현재단]] 관련 업무만 보고 있으며, 강연과 집필 등을 하고 있다. 2020년 12월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사퇴]]하자 후임자로 언론에서 잠시 거론됐으나 2020년 12월 31일 [[문재인]]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이 [[유영민]]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며 결과적으로 대통령비서실장 임명은 무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