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선도 (문단 편집) == 의학 == 윤선도는 의학(醫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내의원에서 불러 인조와 현종 그리고 중궁전의 의약을 하였고, 정적들의 병까지 치료해주었으며, 집과 유배지에서도 진료를 해준 약화제의 기록이 있다. || 46세(1632, 인조10)때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인 [[지천 최명길|최명길]](崔鳴吉)이 그를 유의(儒醫)로 천거하자[* 호의의 뜻이었지만 사대부가 의약에 밝다고하면 천시하던 세태에 의약은 잡학이나 기술이 아니라 의도(醫道)라고 여겼던만큼 못마땅하였기 때문이다.] 거절하면서 말하길,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을 적에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에 견줄 수 있다. 따라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주자(철학자)|주희]](朱熹) 부자(天子)가 또 그 말을 《[[소학]](小學)》이라는 책에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소싯적에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을 맞아 처방을 점검할 즈음에 대략 듣고 본 것이 있을 뿐이요, 의도에는 실로 어둡기 그지없으니, 어떻게 감히 지존(至尊)의 약을 함부로 의논하겠습니까. 성의는 비록 한이 없다 해도 알지 못하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민간에서 알고 지내는 자가 간혹 와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번번이 “알지 못해서 감히 알려주지 못한다.”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혹 일가(一家)에 같은 병증(病症)을 앓는 자가 힘은 없고 일은 급해서 의관(醫官)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에 나에게 와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대략 들은 바를 설명해서 채택하는 데에 참고하도록 한 것이 한두 번 있긴 하였습니다만, 그때에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거나 확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항상 남을 그르치고 스스로를 그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58세 1644, 인조22) 2월 인조가 병이나 그를 불러 의약하려 했으나 그도 병으로 가지 못하고 상소했으나 보고되지 않았다. 66세 (1655, 효종6) 6월 좌윤(左尹) 송시길(尹時吉)이 병으로 자문을 구하자 그가 답하였다. "나에게 약(藥)을 물어보는 것은 바로 맹인(盲人)에게 길 안내를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탁을 받고서 그만둘 수 없기에, 애오라지 옛 처방을 참고하여 멀리서 청한 뜻에 부응하려니,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에 매우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잡치부(雜治賦)〉에 이르기를 '사기(邪氣)를 없애는 것은 도적을 쫓는 것과 같으니, 괴수는 섬멸하되 협종(脅從)은 용서해야 한다. 정기(正氣)를 기르는 것은 소인(小人)을 대하는 것과 같으니, 자기를 바르게 하고 지나치게 따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구본론(求本論)〉에 이르기를 '그 근본을 찾지 않고 다스린다면, 음양(陰陽)의 사기(邪氣)가 더욱 벋어 나가서 제어하기 어렵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보내신 기록 중에 잡증(雜症)이 많습니다마는, 작은 것에 눈길을 주다 보면 큰 것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대병(大病)은 주(酒)가 습(濕)을 발생시키고, 습이 화(火)를 발생시키고, 화가 기(氣)를 잠식하여, 그로 인해서 기가 허(虛)해진 것이니, 담(痰)과 풍(風)은 모두 습과 화가 불러들인 것입니다. 소병(小病)은 대개 심(心)과 신(腎)이 교통하지 못하고 비(脾)와 위(胃)가 화합하지 못한 탓이니, 여러 증상은 모두 여기에 근원하는 것입니다. 대병에는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써야 하고, 소병에는 고암심신환(古庵心腎丸)과 삼백탕(三白湯)을 써야 합니다. 《의학입문(醫學入門)》의 잡병제강(雜病提綱) 풍조(風條)를 자세히 음미하면 육군자탕이 얕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울조(鬱條)의 말단(末端)의 주(註)를 자세히 음미하면 삼백탕이 가벼운 것 같아도 실제로는 무거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의논에 대한 참고용으로 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70세 (1656, 효종7) 중궁의 의약차 내국에 입궐했으며 72세 (1658, 효종9) 4월 공조참의 윤선도가 소를 올렸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의술의 전래는 그 유래가 깊습니다. 역대의 성군(聖君)ㆍ철보(哲輔)로서 이것에 유의하지 않은 이가 없고,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나 효자라면 다 같이 이것에 주의할 줄 알았습니다. 신농씨(神農氏)가 온갖 약초들을 맛보았고 황제(皇帝)는 침구법을 창안하였으니, 이 두 임금이 성군(聖君)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또 이윤(伊尹)은 탕액(湯液)의 시조이고 적양공(狄梁公)은 침술이 신묘하였으며, 범중엄(范仲淹)은 명의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이 세 신하가 현신(賢臣)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이천 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기를 ‘병상에 드러누워 있을 때 되잖은 의원에게 맡기는 것은 부자(不慈)하고 불효(不孝)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를 《소학》에 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다 같이 도를 알지 못하면서도 이처럼 좋은 교훈을 만세에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해 보기는 하였으나, 지식이 얕아서 남들이 더러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신은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전하 역시 이것을 가지고 신을 등용하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74세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현종의 체후(體候)가 미령(未寧)하자, 그를 불러서 약을 의논하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인 이상 경석(李相景奭)이 처음으로 공을 만나 보고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초 이 사람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 약방에서 살펴보건대, 지금 막 중한 논핵(論劾)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털끝만큼도 개의(介意)하지 않으니, 천품(天稟)이 온통 나라를 위한 지성(至誠)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서 말하길, "[[원두표]]가 설사(泄瀉)가 한도없이 나오는 병을 앓아서 윤선도에게 약을 묻자 윤선도가 냉수를 양껏 마신 뒤에 그만 두게 하였다. 원두표의 자제들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우리 집안에 화(禍)를 입히려고 하기 때문에 질병이 더욱 심해지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으나, 원두표가 마침내 밤에 몰래 우물가로 가서 물을 흠뻑마시고 나니 병이 잘 나았다. 자제들이 그렇게 한 까닭을 물으니, 원두표가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입히고자 한다면 어찌 약으로 죽이겠는가?'하였다. 나(정약용)는 어려서 매번 여름철 설사로 고생을 하였는데 번번이 냉수를 가지고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니 또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가 남긴 약화제(藥和劑)를 보면 오선주방(五仙酒方) - 건강주, 선창약(癬瘡藥) - 버짐을 없애는 약, 회충약(蛔충藥) - 회충을 없애는 약, 해수약(咳嗽藥) - 노인들의 해수병 치료약, 복학신방(腹학神方) - 어린애들의 자라배를 다스리는 약, 우역신방(牛疫神方) - 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처방, 등 다양하고 신기한 처치법이 남아있어 고산선생의 의술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