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선도 (문단 편집) == 생애 == 1587년 7월 27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윤유심(尹惟深, 1551 ~ 1612)[* 초명은 尹'''{{{+1 唯}}}'''深으로, 해남윤씨대동보 권1 74쪽에도 이 한자로 등재되어 있다.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12_108502|『임자증광생원진사방(壬子增廣生員進士榜)』]]에는 윤선도의 아버지 이름이 윤의(尹義)로 기재되어 있다.]과 어머니 [[순흥 안씨]](1551 ~ 1609)[* 안계선(安繼善)의 딸이다.]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남동생 윤선하(尹善下)는 아버지 윤유심의 첩 소생이다.] 아버지 윤유심은 별제(別提)를 지내다가 1576년(선조 9) 식년 [[생원|생원시]]에 2등 20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76_005967|입격한 뒤]] [[음서]]로 1587년(선조 20) 청안현감(淸安縣監, 종6품), 1597년(선조 30)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을 거쳐 1605년 예빈시 [[부정#s-10|부정]](禮賓寺副正, 종3품)에 올랐다. 출생 이후 첫째 [[작은아버지]] 윤유기(尹惟幾, 1554. 9. 19 ~ 1619. 5. 13)[* 해남윤씨대동보 권1 75쪽에는 尹'''{{{+1 唯}}}'''幾로 등재되어 있다.]에 입양되었다. 양아버지 윤유기는 1576년 식년 생원시에 3등 2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76_005995|입격하고]]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80_004041|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에 올랐다. 1612년([[광해군]] 4) 증광(增廣) [[진사|진사시]]에 1등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612_108502|입격한 뒤]] [[성균관]] 유생으로 얼신(孼臣)인 [[이이첨]]과 그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양부 윤유기가 이이첨과 같은 당파인 대북파 임에도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0812021_002|#]] 집권세력이 저지르는 불의를 보면 충분(忠憤)의 상소를 올렸으나, 그들의 무함(誣陷)으로 세 차례나 벽지의 유배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집권세력인 서인들의 과도한 횡포로 [[광해군]], [[인조]], [[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등도 오히려 그를 두둔하고 마지못해 집권세력의 뜻에 동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인조반정]] 이후 유배에서 풀려났고, 서윤(庶尹, 종4품)에 제수되었다. 1633년(인조 11) 증광 문과에 병과 17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33_005672|급제한 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어 인조의 총애를 얻었는데, 이때가 바로 윤선도의 생애에서 출사할 첫 번째 기회였다. 이후 왕자 시절 제자였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뒤 다시금 기회를 얻었다. 이때에 여러 차례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당쟁이 치열했던 상황 속에서 북인 가문 출신이었지만 북인의 영수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벽지에 유배를 가고 반정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南人)의 입장에서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에 맞서 강력하게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정치적 한계를 느껴 더이상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세상의 일상사마저 뒤로한 채, 사화와 당쟁으로 인해 은거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상향(理想鄕)인 [[주자(철학자)|주희]](朱熹)의 운곡기(雲谷記)에 기록된 은일적(隱逸的)인 삶[* 산수간에 밭갈고 낚시질하며 본성을 기르고 책을 읽고, 거문고 타며 장구치고 선왕의 유풍을 노래하니, 즐거움에 죽음도 잊을만 하다.]을 찾아 자연에서 유거(幽居)하는 생활로 지냈다. 인적이 없던 깊은 산속인 해남의 수정동(현산)ㆍ문소동ㆍ금쇄동이나, 바다 가운데인 [[보길도]] 부용동의 천석(泉石)이 뛰어난 은거지에 물을 끌어오고, 나무를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자연친화적인 원림(園林)을 조경하여 산수(山水)를 즐겼으며, 그곳에 거문고와 장구, 가무(歌舞)를 배치하여 곡조를 박자에 맞게 익히도록 해서 때때로 듣고 감상하며 자기의 회포를 부치고 답답한 심정을 푸는가 하면,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의 시를 지었다. 시가무(詩歌舞) 합일(合一)이라는 예악사상(禮樂思想)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작용한 것이다.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朝鮮)의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했다. 또한 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읽었으며,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의약에도 뛰어나 [[내의원]]에서 수차례 그를 불러 왕과 중궁전, 대비전의 의약에도 참여케 하고, 정적이었던 [[원두표]](元斗杓)의 심한 설사병을 치료해주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효종이 승하하자 능자리를 선정하는 간산(看山)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대왕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융릉]][* 윤선도가 잡은 효종의 능자리]으로 옮기면서 그를 가리켜 "오늘날의 '[[무학]]'으로 신안(神眼)을 가졌다"라고 칭송하였다. 노년에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효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서인세력과 함께 복제문제로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데에 격분하여 논례소(論禮疎)와 예설(禮說) 2편을 상소했다가 험난한 유배생활을 마치고, 85세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유훈에 따라 그가 생전에 점지해 놓았던 전남 해남 구시리 문소동터에 안장(安葬)되었다. 사후 숙종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전례(典禮)가 바르게 되고 시비(是非)가 정해져서 송시열이 이미 악당(惡黨)의 우두머리의 죄인으로 처벌받았다. 그러고 보면 비록 윤선도의 관작(官爵)을 회복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저승의 원통함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니, 의정(議政)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 중에 [[허적]]이 과중(過重)하다고 하므로, 마침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했다.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탓에 4번이나 유배를 당하며 모두 25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했다.이러다보니, [[남인]] 내부에서도 적을 만들었는데 1675년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숙종(조선)|숙종]]은 그를 특별히 의정(정승)으로 추증해야 한다고 했고 [[허목]]과 [[윤휴]]가 계속 추천하여 그를 의정 벼슬 중의 하나를 추증하려 했으나 [[허적]], [[권대운]] 등 탁남파의 반대로 실패하고 결국 [[이조판서]]에 추증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